츠키시마 케이 x 히나타 쇼요
w. 달향기
눈을 감으면 보이는 풍경이 있다.
가볍게 불던 바람.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던 빛.
머리에 닿는 너의 체온.
바람 속에 감춰진 너의 향기.
내 인생에서 가장 평화롭고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너와 함께한 그 순간이었다.
"히나타 3번에 오백 다섯 잔."
"네 제가 갑니다!!"
해가 떨어진 대학가 술집은 발 디딜틈 하나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차 시끄러웠다. 좁아 터진 가게 안에 최대한 집어넣은 테이블 탓에 평소에도 움직이기 힘든 곳을 히나타는 맥주잔까지 들고 요령 좋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2시가 되고 나서야 겨우 쉴 틈이 생겨 자리에 앉으니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아구구구 저도 이제 늙었나봐요."
"25살도 안 된 어린 놈이 나이 타령이냐?"
허리를 두들기며 나이 타령 하는 히나타를 어이없게 쳐다보던 점장이 구석에 걸린 점퍼를 들어 히나타 쪽으로 집어 던졌다.
"뒤처리는 됐으니까 얼른 꺼져."
"으악! 물건 좀 던지지 말라니까요!"
"내일 중요한 면접 있다며. 뒷정리는 됐으니까 빨리 들어가기나 해."
인상은 험악해도 정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내뱉는 다정한 말에 웃음이 터진 히나타가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넉살 좋게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다.
가게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걸어서 30분. 세상은 시끄럽고 시간은 고요한 이 순간을 히나타는 가장 좋아했다. 에어콘 없으면 죽을 것 같았던 여름이 어느 순간 잠잠해지고 목을 스치는 바람에 온도가 쌀쌀한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이 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이름 하나. 뭐라고 그랬더라. 여름은 너의 계절이고 가을은 나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차갑운 인상에 까칠한 성격과 달리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한 녀석이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늘 네가 가고 내가 오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희안한 녀석.
가만히 걷고만 있었더니 몸이 식는 기분에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달리고 싶은 충동을 자주 느꼈고, 그럴 때면 운동장을 열 바퀴, 스무 바퀴, 오십 바퀴도 넘게 심장이 터질 때가지 달리곤 했다.
그런 나를 보면서 늘 쓸데 없는 짓을 한다고 비웃던 주제에 정신 차려보면 뒤에서 같이 뛰고 있었지. 결국 저도 달리고 싶었으면서 하여튼 튕기는게 일상이던 놈이다.
"하아. 하아."
내뱉는 더운 숨에 하얗게 김이 서린다.
"으아- 진짜 늙었나. 죽겠다 아주."
지금 씻고 자면 4시간은 잘 수 있으려나. 알람을 몇 개를 맞춰야 할까. 내일 중요한 면접인데 잘 할 수 있겠지.
해야 할 일을 하나 둘 세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쌀쌀한 새벽의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향기. 올라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계단 옆 가로등도 비추지 않는 구석에 음침하게 서있는 검은 그림자.
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저기 서 있는 사람은 너였다.
구름이 흘러가고 가로등 대신 달빛이 스며들면서 희미하게 모습이 보였다.
"안녕."
기억 속 모습과 똑같으면서 묘하게 달라진 모습으로 인사를 해온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풍경이 있다.
가볍게 불던 바람.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던 빛.
머리에 닿는 너의 체온.
바람 속에 감춰진 너의 향기.
눈을 뜨면 보이는 풍경은 여전했다.
쌀쌀한 바람.
구름 사이로 떨어지는 달빛.
코끝에 닿는 너의 향기.
바람 속에 흘러들어오는 너.
"늦었잖아 개새끼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오던 어느 날.
네가 내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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