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키히나] 성인
츠키시마 케이 x 히나타 쇼요
‘츠키시마. 네가 성인이 되면 그때 네 소원을 들어줄게.’
‘갖고 싶다고 소원 빌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무엇이든?’
‘무엇이든.’
성인
19회차 #츠키히나_전력60분
w. 달향기
춥다. 몇 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라고 뉴스에서 시끄럽게 떠들던 기억이 흐릿하게 남아있다. 목도리를 둘렀는데 왜 목이 추운 걸까. 최대한 몸을 웅크려 봤지만 걷는 것만 불편해졌을 뿐이다.
아- 춥다, 추워.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은 일종의 주문이었다. 나 지금 너무 추우니 빨리 나타나서 날 따뜻하게 해달라는 주문. 그리고 이 주문을 외우면 거짓말처럼 따뜻해졌다.
“히나타.”
“히나타 상.”
“풉. 히나타 상은 무슨.”
“츠키시마 군. 이 몸은 어엿한 성인이니 히나타 상이라고 불러야 한답니다.”
골목과 골목이 마주하는 지점에 서있는 츠키시마 모습을 발견하고 습관처럼 호칭을 정정하며 발을 좀 더 빨리 움직였다. 드디어 나타난 내 전용 난로. 추위를 잘 타지 않는 내가 드물게 추위를 탈 때면 늘 귀신 같이 등장하는 초능력을 갖고 있는 동네 꼬마다. 뭐, 꼬마라고 부르기 민망할 만큼 자라버렸지만, 한 번 꼬마는 영원한 꼬마인 법.
“으- 춥다.”
“옷이 얇다는 생각은 왜 못해.”
“두꺼우면 움직일 때 불편해.”
“그러면 춥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어릴 땐 내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귀여운 꼬마였는데 어쩌다 이런 잔소리꾼으로 자라버렸을까. 습관처럼 입이 튀어나와 투덜거렸더니 한숨 한 번 내쉰 츠키시마가 쇼핑백에서 두꺼운 패딩을 꺼냈다. 학교 가는 길에 뭘 들고 가나 했더니 나 때문에 챙겨온 모양이다. 말은 늘 밉살맞게 하지만 결국 이렇게 귀여운 행동을 한다.
히죽 웃는 내 얼굴을 보고 잔뜩 썩어 들어가는 표정과 달리, 꼼꼼하게 입혀주는 손길은 조심스럽다. 체격이 워낙 크게 차이 나다보니 츠키시마가 입혀준 패딩에 몸이 파묻힌 꼴이다. 남이 보면 상당히 웃긴 꼴이란 걸 알면서도 딱히 벗고 싶진 않았다.
“아주머니 오신데?”
“너 오니까 안 온데.”
“흐응. 그래도 졸업식인데 가족들 아무도 안 와?”
“안 오는 게 더 편해.”
작년 내 졸업식에는 츠키시마네 가족들까지 전부 모여 졸업축하 가족여행도 갔었는데, 올해는 다들 스케줄이 어긋나 시간 되는 사람이 나뿐이다. 가족이 없는 졸업식이라니.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내가 쓸쓸해서 싫었다.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입을 패딩 밑으로 숨겼다. 츠키시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얼굴을 더 깊게 파묻었다.
“그렇게 파고들면 앞은 보여?”
“잘 보여.”
“눈길 미끄러워. 제대로 보고 걸어.”
내가 형인데 자꾸만 애 취급 하는 츠키시마의 말에 기분이 상했다. 똑바로 잘 보고 있어. 소리 높여 대꾸해주고 재빨리 츠키시마를 앞질러 걸어갔다.
“으악!”
“잘 보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히나타 상.”
정정한다. 앞질러 걸어가려고 했다. 한 발짝 내딛기 무섭게 꽁꽁 얼어붙은 땅을 밟아 몸이 휘청했다. 츠키시마가 재빨리 잡아주지 않았다면 화려하게 굴러 분명히 피를 봤을 거다. 츠키시마 팔에 매달려 갑작스러운 상황에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 살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뛰지 마.”
“응.”
“손.”
조심스럽게 세워준 츠키시마가 당연하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이걸 잡아, 말아. 손 정도야 어릴 때부터 항상 잡고 다녀 익숙한데, 지금 이 상황에서 잡는 건 망설여졌다. 이래서야 누가 형이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네. 이미 깎여버린 형의 위엄과 따뜻한 손에서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츠키시마가 덥석 패딩 끝을 잡았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패딩은 팔 부분이 손가락 끝을 지나 길게 늘어져있었고, 츠키시마가 그 끝을 잡은 것이다.
“야, 똑바로 잡어!”
그게 더 자존심 상해 후다닥 손을 꺼내 잡았더니 씨익 웃는 얼굴이 보였다. 당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더 창피하라고 손깍지를 꼈지만, 돌아오는 건 힘껏 맞잡아오는 무게감뿐이다. 그래도 어릴 땐 내가 늘 이겼던 거 같은데, 최근의 츠키시마는 도통 이길 수가 없다.
“졸업 축하해!”
나를 찾는 건지 두리번거리는 츠키시마를 발견하자마자 품으로 뛰어들어 목에 매달렸다. 상대방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건 우리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스킨십 중 하나다. 어릴 땐 주로 내가 츠키시마를 달고 다녔는데, 내 키를 넘기자마자 자연스럽게 내가 매달리게 되었다.
잠깐 화장실을 다녀왔을 뿐인데 그 사이 끝나버린 졸업식은 졸업하는 학생들과 가족들로 정신이 없었다. 머리를 토닥이며 떨어지라는 신호를 보내는 걸 무시하고 계속 매달렸더니 슬쩍 노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렇게 노려보면 떨어질 줄 아냐. 츠키시마의 얼굴이 히죽 웃는 내 표정을 따라 구겨졌다.
“후우-”
짧게 떨어지는 한숨에 이번엔 몸에 힘까지 빼고 매달렸더니 주변에서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괴롭겠지? 괴로울 거다. 츠키시마는 나보다 배는 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이니까. 아침에 있었던 일의 복수다. 뒤에서 매달렸다면 그냥 끌고 갔을 텐데 앞에서 매달리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웃겼다.
“재밌어?”
“응. 네가 곤란해 하니까 더 재밌어.”
이정도 놀렸으면 됐겠지. 졸업식이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끝난 탓에 배가 고팠다. 맛있는 거라도 사먹으라며 아저씨가 주신 용돈도 있겠다, 졸업식 기념으로 비싸고 맛있는 걸 먹어야 하는데 뭘 먹어야 하나. 돈가스는 너무 어린애들 메뉴고, 라멘은 평소에도 자주 먹었던 거고.
하나하나 메뉴를 고르고 있는데 츠키시마가 너무 조용하다. 지금쯤이면 떨어지라고 밀쳐도 백번은 더 밀쳤을 텐데. 슬쩍 시선을 들어 쳐다봤더니 바로 눈이 마주쳤다. 안경 너머 고요하게 가라앉은 눈을 본 순간, 본능이 위험신호를 보냈다. 지금 당장 도망쳐. 위기감을 느끼고 빠르게 손을 풀어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번에도 츠키시마가 빨랐다.
“우아악! 내려줘!”
손목을 붙잡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어깨 위로 나를 들쳐 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땅에 멀미가 난다. 두 발을 단단히 붙잡은 탓에 발버둥치지도 못하고 애꿎은 츠키시마 등만 퍽퍽 때렸다.
“내려달라니까!”
“재밌어서 내려주기 싫어.”
“난 안 재밌어!”
“네가 재미없어 하니까 더 재밌네.”
시끄러운 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우리 둘에게 집중됐다. 흥미로운 시선들 수군거리는 소리. 아-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싶다. 귀 끝이 새빨갛게 물든 걸 보니 자기도 창피하면서 나 놀리겠다고 꿋꿋이 들쳐 매고 나가는 츠키시마가 어이가 없으면서도 웃겼다. 한참을 발버둥 쳐도 꿈쩍도 안 하는 힘에 내가 먼저 지쳐 그냥 내 몸을 맡겼다.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감각을 즐기며 멍하니 멀어지는 경치를 감상했다. 내가 작년에 졸업하고 츠키시마가 오늘 졸업한 학교가 점점 멀어진다. 히나타 선배라고 부르는 게 듣고 싶어 츠키시마가 입학하고 한동안 쉬는 시간만 되면 츠키시마 반으로 달려갔었는데. 뭐, 그것도 한 달 만에 츠키시마가 누가 있건 히나타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만 뒀지만.
학교 밖을 벗어나 조금 걷다보면 우리 둘이 하굣길에 자주 밥 먹으러 가던 가게가 나온다. 양쪽 부모님이 전부 맞벌이라 자연스럽게 저녁은 밖에서 해결했었다. 의외로 츠키시마는 편식이 심해 메뉴가 나오면 안 먹는 재료를 내 그릇으로 옮기느라 바빴는데, 1년을 꾸준히 다녔더니 가게에 츠키시마 전용 메뉴가 따로 생긴 일도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경치에 추억이 있었고, 그 추억 속에는 늘 츠키시마가 함께였다. 둘 다 졸업했으니 더는 자주 오지 못하겠지. 여기에 저녁노을만 있다면 만화에서나 보던 청춘의 한 장면이 될 텐데.
“츠키시마.”
“왜.”
“나 토할 것 같아.”
아쉽게도 현실은 청춘만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일정한 리듬으로 흔들리는 게 처음에만 괜찮지 계속 반복적으로 느껴지면 당연히 멀미가 나는 법. 당황한 츠키시마가 후다닥 내려준 것과 동시에 눈에 보이는 전봇대로 달려갔다.
“히나타!”
“우욱-”
등을 조심조심 쓸어주는 손길에 몇 번 헛구역질을 했지만, 딱히 넘어오는 건 없었다. 어쩐지 기운이 빠져 땅바닥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미련하긴. 빨리 말 했어야지. 멀미가 날 때까지 가만히 있어?”
잔뜩 찌푸려진 미간과 짜증이 짙게 배인 말투는 전부 내가 아닌 츠키시마 본인에게 향한 것들이다. 조심스럽게 살살 얼굴을 만지는 손길에 기분이 좋아져 웃었더니 츠키시마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하게 변했다. 체온에 얼음이 녹아 바지가 젖는 게 느껴졌지만, 어쩐지 일어나고 싶지 않은 기분. 다정한 손길 하나에 추위도 멀미도 멀리 멀리 날아갔다. 이 시간을 좀 더 길게 보내고 싶었지만, 내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츠키시마.”
“왜.”
“이건 뭐야?”
엉덩이가 한쪽만 볼록한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런 걸 가지고 있었단 말이지.
“그, 그건-”
“츠키시마 군 너무 야한 거 아닙니까?”
딸기가 알록달록 그려진 콘돔 포장지가 참 예쁘고 낯설다. 평소라면 얼굴이 새빨개진 츠키시마를 놀리느라 바빴을 텐데 이건 나도 부끄러워 놀리지도 못하겠다. 하늘 한 번 봤다 땅을 한 번 봤다 복잡한 표정을 짓던 츠키시마가 숨을 한 번 길게 내쉬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오늘 졸업했어.”
“알고 있어.”
“나 이제 성인이야.”
“아직 생일 안 지났잖아.”
무슨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걸까.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비장하던 표정이 언짢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츠키시마가 하고 싶은 말을 알 것도 같고, 모른 척 하고 싶기도 하고. 뚱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츠키시마가 한 걸음에 코앞까지 다가와 내 손에 문제의 콘돔을 쥐어주었다.
“이제 그만 도망가고.”
나를 쳐다보는 츠키시마의 눈에 힘이 들어갔고, 덩달아 콘돔을 쥐고 있는 내 손도 힘이 들어갔다. 바삭- 콘돔 포장지가 구겨지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나랑 섹스하자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애꿎은 콘돔만 동아줄마냥 꽉 붙잡았다.
“그게 내 소원이야.”
불이라도 삼킨 것처럼 목이 뜨겁다.
“갖고 싶어.”
자꾸 입이 말라 침을 모아 삼켜봤지만, 갈증만 더해졌을 뿐이다.
“히나타. 너를 갖고 싶어. 그게 내 소원이야.”
똑바로 쳐다보는 눈동자가 눈이 부셔 아찔한 감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뒤이어 그림자가 지더니 입술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츠키시마. 네가 성인이 되면 그때 네 소원을 들어줄게.’
‘갖고 싶다고 소원 빌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무엇이든?’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