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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키히나] 구원(求願 救援 九園) 2화

생귤시루 2017. 7. 13. 12:32

 

 

츠키시마 케이 x 히나타 쇼요

 

 

 

 

구원(求願 救援 九園)

2화

w. 달향기

 

 

 

 

2. 태양의 수호신

 

 

볼을 때리는 차가운 감촉이 끊어진 의식을 하나씩 연결시키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몸과 여기저기 쑤시는 감각에 의식이 끊겼다 연결됐다 어지럽게 흔들렸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왜 정신을 차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저 이대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여 몸을 일으키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난 여기 이렇게 누워 있을 수 없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지만 들리는 건 없었다. 조금 더 연결 된 의식을 가지고 손가락을 움직이려 노력해봤지만 움직였는지는 알 방법이 없었다.
지금 어떤 상태인 거지? 당했나? 묶였나? 그보다 여긴 어디지? 난 왜 여기 있는 거지? 끊어진 기억과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무기력함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였다. 마치 누군가 뇌를 주물러 곤죽을 만들어 놓은 것처럼 아무것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 온 이유.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 필사적으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되는 의식의 끄트머리를 잡으려 노력했고, 그 끝에 손이 닿는다고 느낀 순간 케이의 의식이 순식간에 밖으로 튕겨 나왔다.

 

"형!"

 

눈꺼풀까지 땀에 푹 젖어 축축한 느낌.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다. 입을 크게 벌리고 물에 잠겼다 올라온 사람처럼 부족했던 공기를 발끝까지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뿌옇게 흐리던 시야가 점점 밝아졌고 그제야 케이는 주변을 살펴 볼 여유가 생겼다.

 

커다란 나무 밑에 누워있었는지 코에는 흙냄새가 맡아졌고, 보이는 것도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뿐이다. 형을 구하기 위해 구원산의 요괴를 찾아가고 있었고, 산에 들어와서 뭘 했더라. 산소가 부족한 뇌가 기억을 드문드문 보여줬다. 산에 들어오자마자 앞이 캄캄해 환술을 푸는 주문을 걸었고, 그리고 아이를 한 명. 아이를 한 명?

 

"헉."

 

억지로 끊긴 기억을 이어가던 케이는 태양 같은 머리카락의 아이를 떠올리고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요괴였을 터.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혹시 어디 당한 건 아닌지 살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다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소지품도 그대로였고 옷만 조금 더러워졌을 뿐.

 

주변을 살펴도 빽빽하게 똑같은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 여기가 쓰러졌던 그 장소인지 옮겨진 장소인지도 구분이 어려웠다.

 

"일어났네?"

 

보이지 않는 아이의 모습에 의아해 하려는 찰나 귀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케이의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튀어 올랐다. 너무 놀라 오히려 목 뒤로 삼켜지는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니 의식이 끊기기 전에 봤던 아이가 웃으며 서있었다.

 

손가락 끝까지 날카롭게 긴장을 유지하며 케이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잠들어서 혹시 죽은 건 아닌가 걱정했었어."

"정체가 뭐야."

"넌? 너는 누구야? 이름이 뭐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방방 뛰는 느낌은 없었지만 여전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화법이었다. 요괴에게 순순히 이름을 가르쳐주는 건 스스로 먹이가 되겠다고 허락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상대방의 이름이 알고 싶다면 본인 이름부터 밝혀야지."

"난 구원산의 요괴. 그렇게 부르면 돼."

"뭐?"

 

혹시나 하는 의심은 있었지만 진짜 봉인 된 요괴인 건가? 구원산의 요괴는 여덟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뚫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사당에 봉인 되어 있다고 전해졌다.

 

사당마저도 하나의 결계인 셈인데 당연히 아홉 개의 결계를 모두 뚫어야만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설마 산 자체가 결계의 장소였던 걸까. 산 안에서라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나? 결계를 통과한 느낌은 없었어. 인간이 이정도로 촘촘하게 결계를 만들 수 있을 리가.

 

늘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얘기를 듣는 케이답지 않게 온몸으로 당황스러움을 드러냈다. 구원산의 요괴라면 한시라도 빨리 형을 살려달라는 소원을 빌어야 했다.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는 있어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으니까. 형의 존재가 케이의 판단력을 흩으려 놓고 있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걸 인지조차 못했다.

 

"구원산의 요괴를 찾아왔다며. 그렇다면 날 그렇게 부르면 돼."

"여긴 구원산이 아니라고 했던 것 같은데."

"구원산이 아니면 떠날 거잖아. 구원산이라고 하지 뭐. 난 네가 마음에 들었고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이건 또 무슨 상황인 걸까. 요괴의 장난? 단순한 변덕? 여기가 정말 구원산이 맞긴 한 건가. 아니 애초에 소원을 들어준다는 요괴가 존재하긴 했었나? 아이의 태도에 점점 이성을 잃어갔지만 케이는 본인이 지금 흥분한 상태라는 것조차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형이 생사를 오가는 순간부터 케이의 이성은 아슬아슬한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형을 이렇게 만든 집안사람들을 죽이고 싶다는 감정과 일단 형부터 살려야 한다는 간절함. 형을 믿고 맡길 곳이 없어 부적으로 결계만 잔뜩 만들고 떠나야 했던 막막함과 슬픔. 여러 가지 감정이 계속해서 케이의 이성을 갉아먹고 있었고 그걸 아슬아슬하게 유지 시켜 준 게 구원산의 요괴였다.

 

소원만 빌면 괜찮아질 거야. 소원만 빌면 형도 다시 살아날 거야. 허무맹랑한 전설 속 이야기라고 무시했던 것에 매달릴 만큼 케이는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아이가 그걸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으니 아무리 케이라도 냉정함과 침착함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똑바로 말해. 여긴 어디고 넌 누구야."

 

단검에 부적을 붙여 장검으로 변형시킨 케이가 망설임 없이 아이의 목에 날을 붙였다. 구원산의 요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정체가 요괴인 것은 확실했고 그렇다면 부적으로 변형시킨 검이 더 효과 있을 것이다. 케이의 예상대로 날은 붙이자마자 아이의 목을 파고들었다.

 

"말했잖아. 난 구원산의 요괴. 네가 믿고 싶은 쪽으로 존재한다고."

"그래? 잘 됐네. 그렇다면 구원산의 요괴님. 츠키시마 가문의 츠키시마 케이가 소원을 빕니다."

 

목의 절반 가까이 날이 파고들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아무런 표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침착한 것도 아니고 무덤덤한 것도 아닌 단 한 톨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無). 그 무표정에 겨우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진 케이가 잔뜩 빈정거리며 말을 꺼냈다, 소원을 빌겠다는 말에 아주 잠깐 아이의 얼굴에 짧은 감정이 스쳤지만, 너무 짧아 케이는 그 감정을 읽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들어줄 수 없어."

"아직 소원도 빌지 않았어."

"난 봉인을 풀고 싶지 않아."

"자유를 원하는 줄 알았는데?"

 

아이와 케이의 기 싸움이 팽팽하게 이어졌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케이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의 얼굴에 감정이 떠올랐고 이번엔 케이도 그걸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인간들은 모두 이렇게 끈질긴 거야? 쳇. 알았으니까 이 칼이나 좀 치워."

"소원을 들어주는 건가?"

"알았으니까 일단 좀 치우라고! 목 아파 죽겠어!"

 

아이의 말에 그제야 케이가 칼을 치웠고, 목을 문지르는 아이의 얼굴엔 짜증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날이 목의 절반을 파고들었던 상처는 아이가 목을 몇 번 문지르니 깨끗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고 보니 피도 안 났었지. 흥분이 가라앉은 케이는 그제야 냉정하게 아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인간이란 놈들은 지겨워. 지겹다고. 왜 이렇게 말을 듣지 않는 거야."

 

말만 내뱉는 것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발까지 쾅쾅 굴리며 아이는 온 몸으로 짜증을 표출했다.

 

"정말 구원산의 요괴가 맞는 거겠지?"

 

요력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고 분노가 아닌 짜증을 토해내는 저 아이가 과거 몇 백 명의 사람을 죽이고 봉인 당한 요괴라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직 아홉 개의 결계는 풀지도 않았는데 당사자를 만났다니. 본인에게 맞다는 얘기를 들어도 확신하기 어려웠다.

 

"너네는 진짜 하나도 안 변하는 구나? 끈질기고 의심이 많고 그러면서 욕심도 많지."

 

케이의 말에 그를 쳐다 본 아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서 진짜 질린다는 감정이 확연하게 느껴져 어쩐지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구원산은 너네가 멋대로 붙인 이름이지. 여긴 내 집이야."

"아홉 개의 뜰을 지나야 한다고 들었는데."

"우리 집 마당이 여덟 개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분명한데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아이는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앞장서서 걸었고, 케이는 긴장감을 풀지 않은 채 그 뒤를 따랐다.

 

분명히 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선 산 속이고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지만, 케이의 감각은 평지를 걷고 있다고 알려왔다. 시야와 감각 사이에 인지 부조화가 느껴져 정신이 자꾸만 몽롱하게 흐려지는 걸 혓바닥을 씹으며 필사적으로 버텼다.

 

"꽤 튼튼하네?"

 

묵묵히 잘 따라오는 케이를 힐끔 바라 본 아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마당이 여덟 개라고 했던가. 벌써 오르막과 내리막을 5번이나 지나쳤다. 한 번 지나칠 때마다 마당이 하나씩이라고 치면 이제 남은 건 3개.

 

"구원산에 봉인 되어 움직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래? 난 움직이는데 전혀 불편하지 않은걸?"

 

가슴을 압박하는 기운에 숨이 가파졌다. 6번째 내리막을 지나서 이제 남은 건 2개. 케이는 아이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말을 이어갔다.

 

"봉인 당한 게 아니라 스스로 봉인 한 건가?"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나질 않네."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안경이 자꾸만 흘러내렸다. 이제 남은 건 1개.

 

"구원산의 요괴."

"그렇게 부르지 마. 물건 같아서 기분 나빠."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케이의 물음에 아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비 오듯 쏟아지던 땀도 울렁거리던 속도 천천히 진정되는 것을 느껴졌다. 허리를 숙이고 걸었었나. 절로 펴지는 허리를 주무르며 케이는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태양의 수호신."

 

등만 보이고 걷던 아이가 뒤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 두 팔을 벌려 내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외쳤고, 강한 빛이 아이의 뒤에서 쏟아져 케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떠야 했다. 태양의 수호신이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뜨니 그곳엔 조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끝이 안 보일만큼 수많은 꽃으로 뒤덮인 넓은 땅과 가운데 조그맣게 솟은 언덕 위에 자리한 작은 집 하나. 이 산은 진짜로 아이의 집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