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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이] 사탕(2019年)

생귤시루 2019. 3. 14. 23:32



쿠로오 테츠로 x 사와무라 다이치





사탕(2019年)

w. 달향기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 수가 없다. 며칠 째 이어지는 야근에 지친 몸은 소파 위로 쓰러지는 게 최선이었다. 씻을 기력도 없고, 이대로 잠들면 딱인데. 재킷이라도 좀 벗어야 할텐데 졸리다. 쓰레기 버리는 날이 언제더라. 멍하니 떠오르는 생각을 나열하던 다이치는 그마저도 관뒀다. 피곤에 쩔은 뇌가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뻑뻑하다 못해 아픈 눈을 겨우 뜨고 내일 일정 확인을 위해 핸드폰을 꺼냈다.


[부재중 통화 3건 : 쿠로오 테츠로]


6시간 전에 찍힌 마지막 부재중 통화를 보던 다이치가 눈만 꿈뻑이다 벼락 맞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났다.


"맞다. 약속!"


프로 배구 선수로 활약 중인 쿠로오와 지옥의 야근러로 생활 중인 다이치는 연인 사이다. 비록 둘다 바빠 한 달에 만나는 시간보다 전화 하는 시간이 더 많은 연인이지만, 누가 뭐래도 서로 좋아 죽고 못 사는 연인이었다.


한 달 전부터 꼭 오늘 만나자고 약속 잡은 쿠로오한테 알겠다고 대답해놓고 일이 바빠 잠시 날짜를 잊는 실수를 저질렀다. 일주일에 한 번은 약속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던 쿠로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신신당부 했는데 결국 혼자 기다리게 만들었다.


피곤에 지쳐 쓰러질 것 같던 몸이 초인적인 힘으로 움직였고, 그대로 집 밖으로 뛰쳐 나가며 전화부터 걸었다. 약속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났고, 부재중 통화조차도 6시간 전에 찍혀있다. 밖에서 혼자 기다리는 것만 아니면 좋겠는데. 초조한 마음을 달래며 급하게 시동거는데 핸드폰 너머로 연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테츠로!"


다급하게 외친 이름에 미안함이 뒤섞여 괜히 눈물날 것 같았다.


- 다이치?

"미안해. 절대 오늘 약속 잊은 건 아니었어."


시동만 켜놓은채 빠르게 내뱉는 사과는 변명이 섞여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을까. 울고 싶은 기분을 내리누르며 다이치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전화도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야. 나도 연락하고 싶었는데."

- 다이치.


피곤에 쩔은 뇌를 거치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말은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횡설수설 튀어나오는 말을 막은 건 차분하게 불리는 제 이름이었다. 화난 음성도 아니었고, 여전히 따스하고 다정한 음성에 초조했던 마음이 풀어지며 이어질 말을 얌전히 기다렸다.


- 괜찮아. 걱정하긴 했지만, 화나진 않았어.

"미안해."

- 지금 괜찮으면 집으로 올래? 얼굴 보고 얘기하자.

"금방 갈게."


며칠 째 수면 시간이 줄어 피곤하다는 것도 내일 새벽부터 움직여야 된다는 것도 다이치의 발걸음을 막을 순 없었다. 꼬우면 자르던가. 아슬아슬 할 정도로 속도를 올리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은 차가 많지 않아 평소보다 빠른 게 도착했다. 대충 주차한 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워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띵동


- 네.

"나, 헉. 허억. 후우~ 나야. 테츠로."


제대로 운동 못 한 몸으로 계단을 오르는 건 무리였나 보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간신히 내뱉고 본인임을 밝히자 곧바로 문이 열렸다.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올려다 보니 편한 복장의 쿠로오가 놀란 눈으로 다이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뛰어왔어?"

"어? 아니. 그게."

"땀 좀 봐. 들어와."


옆으로 비켜주는 쿠로오에게 슬쩍 고맙다고 인사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원래도 자주 드나들진 않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오랜만이라 살짝 낯설어 다이치가 콧등을 긁었다.


"소파 바꿨네?"

"가죽이 많이 상했더라고. 앉아. 물 갖다 줄게."


갑갑하던 재킷부터 벗었지만, 차마 내려놓지 못하고 그대로 손에 쥔 채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자세히 보니 소파 말고도 소소한 인테리어 소품들이 바뀌었고 미묘하게 낯선 풍경이 다이치가 소홀했음을 말하는 것 같아 괜시레 속이 뜨끔했다.


"여기."

"어? 고마워."


볼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깜짝 놀라는 모습에 작게 웃은 쿠로오가 컵을 건내주고 재킷을 가져갔다. 구겨지지 않게 잘 걸어두는 뒷 모습을 보며 조심스레 물 마시던 다이치는 빈 컵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정자세로 앉아 쿠로오를 기다렸다.


연인 집에서 취할 자세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끼는 중이다. 일단 지은 죄가 있기도 하고. 눈만 데굴데굴 굴리던 다이치 시선 끝에 예쁘게 포장된 상자가 보였다.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포장지와 상자 크기를 가늠하던 다이치가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만 꼼지락 거렸다.


"왜 그렇게 앉아 있어?"

"아니, 그냥."


기합이라도 받는 것처럼 각 잡힌 다이치 자세에 의아해 하던 쿠로오가 이유를 짐작하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사와무라 다이치 군."

"네, 넵!"


갑자기 불린 이름에 저도 모르게 기합이 들어간 채 대답했다. 그 뻣뻣한 반응에 웃음 터진 쿠로오가 배를 붙잡고 허리까지 접은 채 한참을 웃었고, 민망함에 다이치 얼굴이 붉게 물들었지만 분위기는 부드럽게 풀렸다.


"뭐가 그렇게 미안한데."

"전부 다. 약속 잊은 것도 미안하고. 연락 못 받은 것도 미안하고."


쿠로오는 조금도 화나지 않았다. 서운한 감정도 없었다. 그저 연락도 못 할만큼 바쁜 다이치가 걱정됐고, 부재중에 찍힌 제 번호를 보고 미안해 할 다이치 생각에 마음이 쓰였을 뿐이다. 다이치가 하는 일이 정말 바쁘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일부러 저를 피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기에 화나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다이치가 귀여워 웃음이 났다.


"이리와. 안아줘."


양 팔을 벌리며 어리광피우는 쿠로오를 잠시 빤히 쳐다보던 다이치가 냉큼 달려가 꽉 끌어안았다. 예상치 못한 기세에 순간 휘청한 쿠로오도 품 안에 가득 찬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매일 봐도 보고 싶은 연인을 너무 오랜만에 만났다. 그동안 전화도 제대로 못 할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며 그리워했고 보고 싶었던 몸이다.


강하게 끌어안고 가슴 가득 들어오는 연인의 체취를 맡으며 둘다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은 품 안에 느껴지는 온기에 집중할 시간이다. 둘다 한참 바쁠 시기라 그런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조금 살이 내린게 느껴졌다. 미묘하게 줄어든 부피감에 안쓰러워 하던 것도 잠시 다이치는 슬그머니 내려오는 손길에 눈을 가늘게 뜨고 쿠로오를 쳐다봤다.


"쿠로오 테츠로 씨. 손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확인하는 거야. 확인. 끝내주게 잘빠진 엉덩이에 별 일 없는지 확인."

"멀쩡히 잘 있으니까 그만 주물러."


현직 배구 선수 악력으로 어찌나 강하게 주물르는지 멍들 것 같았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쿠로오 행동에 다이치도 조금씩 맞받아치며 웃었다. 한참을 실없는 농담으로 티격태격 하던 중 문득 다이치 눈에 아기자기하게 포장 된 상자가 걸렸다.


"테츠로. 저 상자 내꺼야?"

"어떤거? 아, 저거. 아니 봤으면 적당히 모른 척 좀 하지. 바로 내꺼냐고 물어보는 거야?"


쿠로오가 짐짓 화난 척 허리에 손을 두르고 투덜거렸지만, 다이치는 성큼성큼 걸어가 상자를 집어들 뿐이었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포장지를 뜯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예상한 그대로 행동하는 모습에 쿠로오가 황당하다는 표정도 지었지만, 다이치는 전혀 개의치 않고 호쾌한 손놀림으로 뚜껑마저 열었다.


상자 안에는 알록달록 보기만 해도 입에서 군침도는 사탕이 가득 들어있었다. 안 그렇게 생겨서 이런 이벤트는 꼬박꼬박 챙기는 쿠로오 다운 선물이다. 3월 14일 화이트 데이를 기념한다는 카드까지 더할 나위 없는 연인들의 기념일 선물답다.


"무드라고는 전혀 없지."


입으로는 툴툴 거려도 쳐다보는 눈이 다정하다. 쿠로오 테츠로는 한결같이 이런 남자였다. 쿠로오의 불평을 가볍게 넘기며 다이치가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달콤한 딸기맛이 퍼지며 피로가 씻겨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나도 줘."


입 벌리고 서있는 쿠로오한테도 하나 넣어주고 카드를 꺼내 읽었다. 내용은 별 거 없었다. 화이트 데이 기념 선물이라는 설명과 함께 몸 상하지 말고 잘 챙기라는 당부까지 평소와 딱히 다를 거 없는 내용을 읽어내려가던 다이치 눈에 뭔가 걸렸다.


"이건 뭐야?"

"거기까지. 무드라고는 전혀 없어도 이것마저 뺏어가면 안 되지."


상자 안에 사탕 말고 다른 게 들어있었다. 무심결에 꺼내려는 다이치 손을 막으며 쿠로오가 상자를 뒤로 숨겼고, 그 수상쩍은 행동에 다이치가 대체 뭐냐고 눈으로 물었다. 답지 않게 망설이는 모습에 궁금증만 점점 커져가는데 한참을 망설이던 쿠로오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쉽게 하는 말 아니야."

"아직 말 꺼내지도 않았는데?"

"정말 오래 고민하고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고."

"아직 듣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빙빙 돌리는 걸까. 몇 번을 의미없는 대화를 주고 받은 끝에 결심이 섰는지 쿠로오가 웃음기 하나 없는 진지한 얼굴로 다이치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덩달아 긴장한 다이치가 마른 입술을 슬쩍 혀로 적시며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바쁘다는 이유로 얼굴도 못 보는 건 이제 그만 하고 싶어."

"테츠로?"

"같이 살자."


전혀 예상 못한 내용에 다이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눈 앞에 내밀어지는 건 조금 전 다이치 눈에 걸렸던 물건으로 그 정체는 열쇠였다.


"나보고 네 집으로 들어오라고?"

"내가 들어가도 좋고, 새로 구해도 좋아. 같이 살자."


갑작스러운 말에 다이치가 눈만 깜빡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쿠로오 얼굴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입 안에 들어있던 사탕도 다 녹아 사라지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묵을 견디지 못한 쿠로오가 설마 거절이냐고 되묻기 전에 다이치가 열쇠를 집어 들었다.


다이치도 한 번쯤은 생각했던 일이었다. 다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아 같이 살자는 말을 못했는데 쿠로오가 먼저 말해주니 얼떨떨하고 고마운 마음밖에 없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열쇠만 만지작거리는데 쿠로오가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거절 할 줄 알았어."

"그럴리가."


생각만 했던 일이 일어나 얼떨떨했을 뿐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과장되게 가슴을 들썩이며 호들갑 떠는 쿠로오를 보며 크게 웃으며 다이치가 속으로 다음을 기약했다. 같이 살자는 말은 쿠로오가 먼저 했으니 그 다음은 꼭 저가 먼저 하겠다고 다짐하며 쿠로오를 힘껏 끌어안았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화이트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