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쿠로] 족쇄
코즈메 켄마 x 쿠로오 테츠로
[켄쿠로] 족쇄
#쿠로른_전력_60분
w. 달향기
리에프는 배구가 재밌었다. 빠른 판단력으로 움직여야 하는 스릴감이 좋았고 작은 공 하나에 희비가 엇갈리는 단순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런 배구를 알려준 배구부 역시 매우 재밌었다. 눈에 띄는 천재는 없어도 얼마든지 천재를 압도하는 그들의 연결고리가 상당히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특히나 가장 흥미롭고 재밌는 것은 주장 쿠로오 테츠로와 세터 코즈메 켄마의 관계였는데.
"켄마 못 봤어?"
"화장실 갔을 걸?"
쿠로오 테츠로는 단순한 팀원들을 복잡하게 이어주는 남자였다. 타고난 체격과 좋은 머리는 모든 선수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만드는 힘이였다. 감독과 코치마저 신뢰를 주는 이 남자가 유일하게 약해지고 무너지는 존재가 바로 소꿉친구인 코즈메 켄마였다. 오랜 시간 둘을 지켜본 부원들은 이미 익숙해 졌는지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이상하게 여기는 이는 없었지만.
리에프는 부족한 기술을 쿠로오에게 배우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리에프가 쿠로오에게 가장 많이 배운 것은 기술이 아닌 켄마에 관한 것들이다. 둘은 훈련을 하면서 사적인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쿠로오의 시선과 행동이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켄마 어디갔다 왔어."
"화장실."
"어딜 간다면 간다고 말 하고 가라니까."
"쿠로 귀찮아."
엄마도 아니고 모든 동선을 일일이 체크하는 저게 안 이상하다고? 리에프는 저는 당연히 보통일 테니 부원들이 모두 이상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쿠로오는 부원들을 귀찮게 구속하는 주장이 아니다. 상당한 방임주의로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다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로 사람을 이끄는 타입이다. 그러나 유독 켄마가 관련이 되면 구속하고 집착하는 면모를 보였는데 부원들은 전부 소꿉친구니까- 라는 말로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질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을 때면 늘 쿠로오 시선의 끝은 켄마였다. 행여 켄마가 다른 곳에 가더라도 어디에서 무얼하는지 전부 알고 있어야 했다. 리에프가 쿠로오와 연습을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기술에 대한 설명이 아닌 켄마의 위치와 행동이었다. 더 이상한 것은 이 모든 귀찮은 행동을 켄마가 받아주고 있다는 것이다.
체육관 안에서는 쿠로오 시야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고 따로 떨어져 있을 때는 주기적인 보고와 연락을 했다. 소꿉친구라는 게 이런 건가? 아니다. 리에프는 소꿉친구가 없었지만 이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코즈메 상과 대체 무슨 사이예요?"
연습하다 말고 꼬박꼬박 연락을 확인하는 모습에 참았던 질문이 터졌다. 그 말에 쿠로오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소꿉친구. 반드시 함께여야 하는.' 이라고 대답했던가. 친구면 친구지 반드시 함께 하는 친구는 또 뭐란 말인가. 그 이상한 문장에 게이냐고 되물었을 때는 쿠로오가 한참을 웃느라 결국 그날 연습은 그대로 끝이났다.
그날의 이상한 대답을 시작으로 리에프는 저도 모르게 쿠로오와 켄마를 눈으로 쫒았다. 켄마가 사라진다. 쿠로오가 찾는다. 켄마가 나타난다. 쿠로오가 안심한다. 충분히 이상하면서도 지극히 평범한 패턴이었다. 그렇게 둘을 눈을 쫒으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쿠로오가 생각보다 둔하다는 것이었고 켄마는 생각보다 훨씬 예민하다는 것이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봐. 그만 쳐다보고."
이례적으로 쿠로오가 켄마를 놔두고 볼일을 보러 나간 날이었다. 그건 매우 평범하면서도 쿠로오와 켄마 사이에서는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끈질기게 쳐다봤는지 쳐다보는 켄마의 눈꼬리가 평소보다 높이 올라가 있었다. 늘 고요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차분하던 켄마의 색다른 모습에 리에프가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쿠로오 선배와 무슨 사이예요?"
똑같은 질문에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지 기대감에 심장이 뛰었다. 분명 지금 리에프의 얼굴은 선물 포장을 뜯기 직전의 아이같은 얼굴일 테다. 리에프를 빤히 바라보는 켄마의 표정은 속을 읽기 어려웠다. 대답을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려는 순간 느릿하게 켄마의 목소리가 움직였다.
"족쇄."
"네?"
"족쇄라고."
그 말과 동시에 켄마 너머로 차갑게 표정이 굳은 쿠로오가 보였다. 우와- 나 이거 실수한건가. 리에프의 시선에 뒤를 돌아본 켄마가 쿠로오를 발견했지만 아무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애지중지 하던 소꿉친구에게 족쇄 취급이라니. 그렇게 안 봤는데 코즈메 상 잔인한 사람일지도. 차분하게 흐르는 공기가 무겁고 날카롭게 느껴져 리에프는 도망치고 싶었다. 눈치만 살피며 언제 도망칠까 궁리하던 리에프는 그날 아주 진귀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쿠로오가 켄마를 놔두고 혼자 나갔다.
"체육관 문 열렸으려나."
가방 속에 있어야 할 핸드폰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장소가 체육관인 것이 떠올라 문이 닫히기 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 늦진 않았는지 체육관은 불이 켜져 있었고 문을 열자마자 근처에 떨어진 핸드폰을 찾을 수 있었다. 가방 속에 집어 넣는 다는 게 밖으로 떨어진 모양이다.
찾던 것도 찾았겠다 돌아가려던 리에프는 비품실에서 들리는 소리에 홀린듯이 걸음을 옮겼다. 누가 제대로 문단속도 안 하고 나간거야. 이러면 괜히 나만 쿠로오 선배한테 잔소리 듣는 다구. 물건 떨어지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가까이 다가갈 수록 사람 목소리로 들렸고 더 가까이 다가간 순간 두 사람 목소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켄마."
목소리의 주인공은 쿠로오와 켄마였다. 사실 별로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는 부원이라면 주장인 쿠로오일 확률이 높았으니까. 다만 의외인 점은 오후에 냉랭한 분위기였던 두 사람이 같이 있다는 거. 아닌가? 냉랭한건 쿠로오 선배 혼자였나. 코즈메 상은 평소와 똑같은 분위기이긴 했지.
본능적으로 발걸음을 죽이고 다가가니 또렷해진 말소리와 함께 어렴풋이 비품실 안의 풍경도 보였다. 문을 등지고 있는 쿠로오의 등이 먼저 보였고 그 등뒤로 둘러진 손은 분명 켄마의 것이었다. 뭔가 미묘한 분위기의 두 사람 모습에 절로 긴장감이 생겼다.
"내가, 내가 억지로 널 붙잡은 거냐. 나때문에 싫은 걸 참고 있는 거였어?"
차분하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격양되어 날카롭에 튀었다. 처음보는 쿠로오 모습에 깜짝 놀란 리에프가 들고있던 가방을 놓쳤고 다행이 떨어지기 직전에 잡아챘다. 휴- 들킬 뻔했네. 보면 안 되는 광경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몸을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쩌면 이건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둘의 관계를 알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훔쳐보다 걸리면 크게 혼날게 뻔했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다시 비품실 안의 상황에 신경을 집중햇다.
"내가 정말. 너한테 족쇄야?"
주장이 저런 목소리도 낸 적 있었던가. 격양되었던 목소리가 이번에는 연약할 정도로 가늘게 떨렸다. 족쇄라니 확실히 심한 표현이긴 했어. 저가 한 질문때문에 이 사단이 난 것 같은 찜찜한 기분에 리에프는 켄마의 잘못이라고 되내이며 죄책감을 털어냈다. 난 아무 잘못 없다. 족쇄라는 말로 상처를 준 건 코즈메 상이었다고. 난 그저 질문한 죄밖에 없어. 아니지. 질문이 죄가 될 순 없지. 어떻게든 켄마의 잘못이라고 끊임없이 되내어 보지만 목소리에 이어 떨리는 어깨가 보이는 순간 무릎꿇고 사과 하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쿠로."
리에프가 밖에서 지금 뛰쳐들어가 내 잘못이라고 무릎꿇고 사과를 할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침묵을 유지하던 켄마가 입을 열었다. 위로 퍼지는 목소리, 따라 올라가는 손, 감기는 뒷덜미. 그리고 마주친 눈동자. 쿠로오의 목을 잡아 내려 짧게 여러번 입을 맞추는 켄마의 모습은 절대 소꿉친구의 모습이 아니었다. 쿠로오와 켄마가 무슨 사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리에프는 절대 소꿉친구만큼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잡아끄는 손에 순순히 고개를 내린 쿠로오의 얼굴이 켄마의 어깨에 닿았다. 항상 여유롭고 능글맞아 늘 어른처럼 보이던 주장 쿠로오 테츠로는 여기 없었다. 켄마보다도 한참은 작아보이는 모습에 오후에 했던 질문보다 이 모습을 본게 더 큰 실수를 저지른 기분이 들어 리에프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만 훔쳐보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발을 떼는게 쉽지 않았다. 쿠로오가 고개를 숙이면서 가려졌던 켄마의 얼굴이 어깨너머로 보였고, 켄마와 정확히 시선이 얽힌 탓이다. 마치 처음부터 네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한 눈동자에 리에프는 숨까지 죽여야 했다.
"쿠로- 너만 있으면 돼. 나한테 중요한 건 너뿐이야."
차분한 말은 다정하게 쿠로오를 달래고 있었지만 켄마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리에프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말이 족쇄가 되어 쿠로오를 옭아맬거라는 걸.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켄마의 눈동자는 검고 끈적끈적한 빛으로 어두웠고 쿠로오에 대한 집착이 직설적으로 느껴져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계속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가는 저까지 족쇄에 걸려들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장소를 벗어나야 했다. 뻣뻣하게 굳어지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이려는 리에프를 비웃듯이 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른 건 필요없어. 원하는 건 너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리에프는 도망치듯이 체육관을 벗어났다.
이제 남은 건 쿠로오와 켄마.
두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