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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Q/HQ 글

[켄히나] 孤陽(고양)

 

 

2016.06.26 日

켄히나 교류회

장거리연애 지원 사업단

 

코즈메 켄마 x 히나타 쇼요

 

 

 

 

孤陽

w. 달향기

 

 

 

 

우리는 혈액이다

막힘없이 흘러라

산소를 운반해

뇌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걸까. 쏟아지는 빗줄기의 양이 심상치 않다. 피부를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를 어떻게든 피해 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로 갈 수 있지. 어디든 가야 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애써 외면하던 현실의 막막함에 숨이 막혔다.

 

-”

 

자꾸만 속에서 튀어나오려는 덩어리를 눌러 삼키느라 속도가 더뎠다. 아직은 안 돼. 입을 틀어막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넘치는 건 무시했다. 여긴 안전하지 않아. 그럼 어디가 안전할까. 시선 끝에 닿는 건 빽빽하게 쏟아지는 빗줄기와 흙탕물로 더러워진 웅덩이뿐이다.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그저 발길이 닿는 데로 무의미하게 걸었다.

 

찰박.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들리는 물 튀는 소리가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고인 웅덩이 속에 떠나온 장소가 흔들리고 있었다. 물이 흔들릴 때마다 마음도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더는 저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마음이 무너지기 전에 웅덩이를 밟고 건넜다. 바지 끝이 진흙으로 얼룩졌다.

 

하아- 하아-”

 

점점 숨 쉬는 게 힘들어졌다. 입에서 흐르는 것이 침인지 빗줄기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흐리다. 잔뜩 물에 젖은 몸이 무거워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여기 까진가. 더는 무리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무릎이 꺾였다. 무릎에 닿는 물이 차가웠다. 아니, 가슴이 닿는 건가. 얼굴도 축축한 것 같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느껴지는 건 피부를 아프게 때리는 빗줄기뿐. 눈을 한 번 깜박일 때마다 시야가 점점 까맣게 물들어 갔다.

 

이상한 게 굴러들어왔네.”

 

찰박. 웅덩이가 밟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뿐이다. 눈꺼풀은 움직이지 않았고 통각도 점점 둔해졌다. 모든 감각이 멀어지는 이상한 기분. 이대로 쓰러질 수 없다는 마음이 무너짐과 동시에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끝이다.

 

 

 

***

 

 

 

숨 막혀. 숨이 통하는 구멍에 거름망이 껴 있는 것처럼 답답하다. 어떻게든 답답함을 벗어나고 싶은데 몸이 꼼짝도 안 했다. 콰득- 끔찍한 소리와 함께 목에서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다. 안 돼. 싫어.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피. 영혼까지 사라지는 기분 나쁜 느낌. 조금 전까지 움직이지 않던 몸이 거짓말인 듯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괜찮아. 조금만 참아. 아프지 않게 해줄게.”

 

처음 듣는 목소리가 다정한 척 달랬다. 그게 아냐.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입을 벌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억지로 쥐어 짜였다. 서러움에 눈물이 흘렀다.

 

울지 마. 이제 괜찮아.”

 

달래주는 손길에 화가 났다. 그게 아니란 말이야. 난 아프지 않아. 화를 내고 따지고 싶은데 지친 몸은 휴식을 원했고 어느 순간 의식이 끊겼다.

 

 

 

 

오빠.’

 

작은 손. 따뜻한 감촉. 안으면 햇살 냄새가 났다. 밝고 따뜻하고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아이. 노란 꽃밭 한가운데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에 심장이 빨리 뛰었다. 심장보다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기다려. 조금만 기다려. 내가 금방 갈 거니까. 그러나 아무리 뛰고 또 뛰어도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오빠.’

 

공기 중에 목소리가 퍼져 흐릿하게 들렸다. 곧 사라질 것처럼. 마음은 다급한데 가까워지지 않는 거리에 속이 타들어 갔다. 기다리라고 목이 터지라 외쳤지만 들리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손을 뻗어 움켜쥐는 순간 공간이 부서져 흩날렸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에 소름이 끼쳤다.

 

나츠-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그제야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아아악-”

정신 차려!”

 

나츠. 나츠. 나츠. 불쌍한 내 동생.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러면 안 됐어.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 눈을 감으면 힘없이 떨어지던 작은 몸이 보였고, 귀를 막으면 연약하게 흔들렸던 부름이 들렸다. 달려갔어야 했다. 나는 오빠니까.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갔어야 했다.

 

허억. 허으윽.”

정신 차리고 숨 쉬어!”

 

이제 와 손을 뻗어봤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이봐!”

-”

 

짜악-

왜 도망친 거야.

 

정신 차리란 말이다.”

끄윽.”

 

짜악-

왜 도망쳤어.

 

눈 뜨라고!”

커흑- 하아. 하아.”

 

물이 차올라 뿌옇던 시야가 한순간 맑아졌다. 힘없이 떨어지던 작은 몸도 사라지고, 연약한 부름도 사라지고, 남은 건 처음 보는 피투성이의 얼굴. 누구지. 가슴뼈가 부서질 것처럼 숨을 들이마셨다. 호흡이 걸려 목이 찢어질 것 같은 와중에 그래도 살고자 숨을 내쉬었다.

 

강하게 노려보는 눈동자. 대체 누굴까.

 

겨우 살려 놨는데 멋대로 죽지 마.”

 

입가에 고인 피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 멱살이 잡혔던 건가. 눈 밑을 닦아주는 손에 숨 쉬는 것이 조금 더 편해졌다.

 

, - .”

괜찮아.”

 

허망하게 뻗어진 손 안이 가득 찼다. 낯선 체온이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아주고 있었다.

 

, . 동생이- 내 동생이-”

알아. 괜찮아.”

 

난 비겁한 오빠여서 괜찮다는 그 말에 위로받았다.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던 죄책감이 아주 조금이지만 가벼워졌다. 그게 또 너무 미안해서. 그런 나 자신의 비겁함이 한심해서 낯선 손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오빠.’

 

흐릿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금세 사라졌다.

 

 

 

***

 

 

 

흐음.”

 

쿠로오 테츠로는 오랜만에 난감하다는 단어를 실감했다. 불법침입자가 있다는 경보음에 잠시 산책하러 나갔다가 주워 온 이상한 꼬맹이. 여러 가지 피가 뒤섞여 몸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던 돌연변이. 집 앞에 이런 이상한 게 죽어있으면 찝찝할 것 같아 데려온 건데,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켄마.”

쿠로.”

 

쿠로오는 피로 범벅된 켄마의 입을 자신의 소매를 끌어올려 닦아주었다. 소매가 까맣게 물들었다. 까만 피는 더러움의 상징.

 

켄마. 이번엔 무모했어.”

미안.”

 

코즈메 켄마는 네코마 일족의 뇌이자 척추이자 심장이다. 이런 더러움에 물들면 안 되는 신성한 존재. 네코마 일족은 모두 켄마를 움직이기 위한 혈액이었고, 켄마는 네코마 일족을 유지하는 기둥이다.

 

얼마나 마신 거야.”

먹진 않았어. 그저 빨아냈을 뿐이야.”

야쿠가 오기 전에 옷부터 갈아입어. 야쿠 보면 화낸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쿠로오의 잔소리에 몸을 움직이던 켄마가 우물쭈물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평소 켄마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변명하는 법이 없다. 그게 켄마의 위치였고, 네코마 안에서 암묵적인 규칙이다. 기둥은 흔들리면 안 되는 존재. 항상 고결하고 깨끗하게 자리하고 있어야만 한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켄마가 변명한다는 건 그만큼 방금 했던 일은 위험한 일이었다는 뜻이고, 최소한 쿠로오한테는 설명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 야쿠한테는 내가 잘 설명할게.”

 

켄마가 벗어놓은 옷가지를 챙기며 쿠로오가 말했다.

 

쿠로.”

 

켄마의 부름에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대충 손만 흔든 쿠로오가 방을 나섰다. 뒷말은 없었지만, 켄마는 말했고 쿠로오는 알아들었다.

 

고마워.’

 

- 이제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눈에서 불을 뿜는 야쿠의 모습이 보여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죄가 있다면 켄마와 소꿉친구인 자신의 위치겠지.

 

 

 

 

쿠로오가 나가고 조용해진 방 안에 낮은 숨소리만이 들렸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켄마는 뭔가에 홀린 듯이 다가가 자연스럽게 손을 잡았다. 그저 잠깐 잡았을 뿐인데 찌푸려진 미간이 풀리는 광경에 켄마의 눈이 반짝였다.

 

누굴까. 네코마 일족은 아니다. 그렇다고 주변의 다른 일족도 아닌 것 같다. 짐작할 수 있는 건 산 아래 있는 인간 마을. 거기 사는 인간일 확률이 높다. 아니 인간이 확실하겠지. 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 탈이 나는 건 인간밖에 없으니까.

 

쿠로오가 이상한 걸 주웠다며 보여줬을 때는 이미 심각한 상황이었다. 전신에서 맡아지는 짙은 혈향. 항상 맑은 피만 섭취해야 하는 켄마에게는 쓰레기보다 지독한 악취였다. 여러 가지 피가 뒤섞여 엉망이었고, 그 피가 몸을 좀 먹어가고 있었다.

 

죽었나?

 

처음 보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비에 잔뜩 젖었는데도 피로 범벅되어 있었다. 비에 씻기기 무섭게 피를 토했을 거다. 그 증거로 숨을 내쉴 때마다 입에서 피가 흘렀다. 오염되고 더러운 증거의 검은 피가. 쿠로오가 주워오지 않았다면 확실하게 죽었을 거다. 그리고 더러운 피로 인해 죽지도 못하는 잡종으로 다시 태어났겠지. 결벽증이 있는 쿠로오는 그걸 참을 수 없었을 거고, 그래서 다시 태어나기 전에 없앨 생각으로 주워온 거다.

 

그걸 알면서도 켄마는 뭔가에 홀린 듯이 쿠로오에게 달라고 말했다. 더러운 건 만지지도 않아야 하는 신성한 존재라는 위치도 망각한 채, 독이나 다름없는 것을 달라고 요구했다. 쿠로오는 절대 안 된다고 날뛰었지만, 자신의 소꿉친구는 단 한 번도 자신을 이겨본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승자는 켄마였다.

 

네코마 일족의 기둥. 뇌이자 척추이자 심장. 신성한 존재. 더러움은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뱀파이어. 무엇보다 순수하다는 건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 켄마가 다치진 않겠지만, 결벽증이 있는 쿠로오는 켄마에게 더러움이 묻는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해 보였다. 그걸 알면서도 켄마는 스스로 독을 가지고 침실로 들어왔고, 심지어 그걸 치료하기까지 했다. 섞여서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피를 빨아내고 또 빨아냈다. 깨끗하고 맑은 피가 나올 때까지.

 

쿠로오보다 더 심한 결벽증을 가지고 있는 야쿠라면 길길이 날뛰다 못해 켄마의 피를 소독하겠다고 난리 피울 거다. 리에프 멱을 따올지도 모른다. , 그런 자잘한 문제는 쿠로오가 해결하겠지. 태평한 생각을 하며 켄마는 눈앞의 존재에 집중했다.

 

괜찮아. 이젠 괜찮아.”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을까. 뭐에 홀렸던 걸까. 치료해 놓으니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건 태양을 닮은 머리카락. 만지니 부서지는 것처럼 가볍게 흘러내렸다. 그게 꼭 태양의 떨어지는 것 같아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어서 눈을 떠.”

 

그리고 이름을 알려줘. 태양을 바라보며 켄마는 잠시 낮잠에 빠졌다.

 

 

 

***

 

 

 

히나타 쇼요의 집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집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만큼 행복한 집이었다.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산 위에 뱀파이어들이 사는 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뿐이다. 뱀파이어와 인간은 다른 시간을 살고 있었고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가끔 산에서 길 잃은 인간도 있었지만, 무언가에 홀린 채 정처 없이 걷다 보면 산을 벗어나곤 했다. 아주 가끔 외지에서 뱀파이어를 만나러 왔다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몇 날 며칠을 산에서 헤매기만 하다 거지꼴이 되어 돌아갔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뱀파이어라는 존재가 확실히 있었지만, 그건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허상의 존재들이었다. 마치 공기와도 같았다. 그래서 그게 나타났을 때 처음에는 뭔지 알 수 없었다.

 

- - 피를.”

 

공기를 찢고 들리는 목소리가 기분 나빴다. 우습게도 처음에는 기분이 나쁘기만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아 벽에 처박혀 잠시 정신을 잃었을 때도 위기감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 -”

 

꺾인 목에서 마지막 비명처럼 희미한 부름이 들렸을 때, 그제야 발밑이 꺼지는 공포가 생겼다. 서서히 빛을 잃어가던 눈동자. 그 눈을 바라보면서도 무서워 벌벌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팔이 붙잡히고 목이 물어뜯기고 마지막 영혼 한 조각까지 부서지는 동안 할 수 있는 건 그저 살아있는 것밖에 없었다.

 

 

 

 

나츠.”

 

뿌옇던 시야는 눈을 감았다 뜨는 거로 맑아졌지만, 아직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함. 목이 찢어질 것처럼 칼칼하다.

 

물 마실래?”

 

낯선 목소리에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처음 마주한 뱀파이어의 존재. 쓰러져있던 부모님. 꺾여버린 동생.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순식간에 긴장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천천히 느리게 움직이는 상대방을 경계하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 마셔도 되는 물이야.”

 

노려보는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직접 물을 마셔 안전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경계하는 것이 물이 아니었는데 알면서도 전혀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바싹 몸을 기댄 채 조용히 숨을 삼키고 상대를 관찰했다.

 

뿌리 쪽만 까만색의 이상한 금발 머리. 아무렇게나 걸친 망토 같은 옷차림.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가벼운 몸놀림이 마치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이상한 남자. 그리고 벌어진 입 사이로 살짝 보이는 날카로운 송곳니.

 

- 으으윽-”

 

날카로운 송곳니. 처음 마주한 뱀파이어와 똑같이 날카로운 송곳니. 그걸 깨닫는 순간 발밑이 꺼지면서 몸이 떨려왔다. 처음 마주한 죽음의 공포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좁아져 눈앞에는 거대한 송곳니밖에 보이질 않았다.

죽일 거야. 이번엔 확실하게 죽일 거야. 벗어난 줄 알았던 죽음이 발밑부터 집어 삼켜왔다. 미칠 것 같은 공포에 목이 막혀 숨 쉬는 것도 힘들고, 목소리도 나오질 않았다.

 

어떻게든 도망치려 물러섰지만, 멀리 서 있던 남자가 움직이자마자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진정해. 괜찮아. 이제 괜찮아. 여긴 안전해.”

 

빠르게 다가온 남자는 피할 틈도 없이 강한 힘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붙잡히고 나서야 몸이 떨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공포에 질려 흔들리던 눈이 뭔가에 홀린 듯이 남자에게 고정됐다.

 

난 코즈메. 코즈메 켄마야. 여긴 내 집이고.”

 

어깨를 붙잡은 손의 체온과 낮게 들리는 목소리가 처음인데 낯이 익었다. 점점 떨림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는지 어깨에 있던 손이 느린 속도로 팔을 타고 내려와 손을 붙잡았다.

 

- 이 손을 알고 있어. 이 손을 통해 위로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남자는 아니었다. 위험하지 않은 존재. 위로를 주었던 안전한 존재. 가빠지던 숨이 천천히 제 속도를 되찾았다.

 

난 코즈메 켄마.”

켄마.”

이름. 알려줄 수 있어?”

 

침착하고 차분한 눈동자와 목소리에 공포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걸 느꼈다. 처음 보는 낯선 존재지만, 안심할 수 있는 존재. 몸과 마음이 지쳐 뭐든 기대고 싶은 지금 눈앞에 손을 잡아주는 남자가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쇼요.”

 

이름을 들은 남자가 나비가 날 듯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에 마지막 남은 공포 한 조각이 날아갔다. 공포가 사라지고 진정되니 조금 전 모습이 창피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은 분명 빨개졌겠지. 부끄러움에 시선을 내리니 단단하게 붙잡힌 손이 보였다. 켄마. 코즈메 켄마. 몇 번 발음하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난 쇼요야. 히나타 쇼요.”

쇼요.”

 

서로 손만 잡고 아무것도 안 하는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통성명은 끝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여긴 어디냐고 물어야 하나. 일단 손은 좀 놓고 싶은데. 하고 싶은 말과 해도 되는 말을 찾느라 눈만 굴리고 있는데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켄마. 들어간다.”

 

이번에 들어온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 일색인 남자였다. 켄마보다 컸고, 존재감이 더 짙어서 솔직히 조금 무섭다.

 

괜찮아 쇼요. 쿠로는 안 위험해.”

쇼요?”

 

토닥이는 손길에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옅어졌다. 그에 반해 쿠로라고 불린 남자는 오히려 나에 대한 경계심이 올라간 것 같았다.

 

히나타 쇼요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깔끔하게 고쳐놨네.”

야쿠는?”

 

일단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숙였지만, 돌아오는 건 자연스러운 무시. 따질 입장도 아니어서 그냥 얌전히 켄마의 손만 바라봤다. 지금 여기서 믿을 수 있는 건 이 손뿐이니까.

 

야쿠한테는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열 받아서 뛰쳐나간 걸 리에프가 찾으러 갔으니까. 돌아올 때쯤이면 괜찮아질 거야.”

.”

야쿠가 유난히 너한테 더 각별하게 굴잖아.”

알아.”

괜히 사과라도 하면 야쿠 운다.”

알았어. 조심할게.”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쉽게 물을 수가 없었다. 여긴 어디야. 너는 누구야. 난 왜 여기 있어. 난 어떻게 된 거야. 난 어떻게 해야 해?

 

쇼요는 당분간.”

 

내뱉지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켄마가 대답했다. 방 안의 모두가 켄마의 입만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당분간 여기서 지낼 거야.”

켄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가 불같이 화냈고, 나는 얼떨떨했다.

 

나랑 같이.”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담담했지만, 백 마디 말보다 효과가 좋았다.

 

옆에 있어 줄 거지. 쇼요?”

 

가볍게 물어오는 목소리에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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