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타지 처돌이가 이번에는 초능력자를 들고 왔습니다.
나루미야 메이 x 미유키 카즈야
겨울 바람
w. 달향기
한 달 넘게 괴롭히던 괴물들을 소탕하고 오랜 만에 한가한 오후였다. 저마다 책상에 늘어지게 앉아 시시덕거리며 시간만 떼우던 대원들 분위기가 한 사람의 등장과 함께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언제 늘어졌냐는 듯 칼 처럼 정확한 각도로 기합이 들어간 경례를 하는 대원들 사이로 그들의 대장 미유키 카즈야가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잠시 정찰 좀 다녀오겠습니다."
선두를 시작으로 너나 할 것 없이 정찰 다녀오겠다며 비어버린 사무실은 명백하게 당신과 함께 있기 싫다는 의미였으나 당사자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썰렁할 정도로 텅빈 사무실은 미유키가 움직이는 만년필 소리만 나직하게 들렸고, 한가하다 못해 살짝 졸음이 올 정도의 평화였다.
"천재 나루미야 메이님이 오셨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평화는 30분을 못 가 깨졌다. 조용한 침묵을 산산조각 내며 등장한 나루미야가 텅빈 사무실을 둘러보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미유키에게로 날아갔다. 쓸만한 능력은 전기 속성 하나뿐이지만, 짧은 거리라면 비행 속성도 쓸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서 능력 사용은 엄격히 금지 되었으나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나루미야는 가볍게 날아 미유키가 바삐 일하는 책상 위에 앉았다.
"카즈야~ 아무도 없네?"
음흉하게 웃으며 미유키 넥타이 끝을 슬쩍 잡고 몸을 베베 꼬는 나루미야를 냉정하게 쳐다보던 미유키가 짝- 소리가 날 정도로 단호하게 손을 쳐냈다.
"방해하지 말고 비켜."
"너무해~ 사내 연애 중인 커플에게 이런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지 모르는 거야?"
상처 받았다는 듯 어깨까지 들썩이며 우는 소리를 내뱉는 나루미야를 노려보며 미유키가 아주 살짝 힘을 썼다. 몸을 옥죄는 압력에 밀려 반대편 벽까지 밀린 나루미야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비련의 주인공마냥 바닥에 쓰러져 눈물을 펑펑 쏟았다.
아주 작은 물방울 정도라면 물 속성도 쓸 수 있는 나루미야 메이였다.
"하나밖에 없는 연인을 이렇게 차갑게 내치다니. 바람 난거지! 더이상 날 사랑하지 않는 거지!"
어흐흑- 참 크게도 우는 통에 만성 편두통에 시달리는 미유키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과학이 발달하고 발달하고 극단적으로 발달한 세상의 끝은 사람들의 상상과 전혀 달랐다.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사람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가 일을 하는 그런 상상 속의 세상은 없었다. 과학의 발전을 위해 착즙하고 파괴했던 자연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다양한 돌연변이 괴물을 만들어 인간을 없애기 시작했다.
인간은 진화하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온갖 무기로 괴물을 없애고 스스로를 보호하던 인간은 무기로도 없앨 수 없을 만큼 괴물이 진화하자 그에 맞춰 같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울음 소리로 1km 내의 모든 생물을 파괴한 신생아를 시작으로 기이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태어났고, 그렇게 멸망의 시작점을 마주한 후에야 인간은 살아 남을 수 있었다.
"나루미야."
"어리고 탱탱한 나를 꼬실 땐 언제고. 맛 보니까 흥미가 떨어졌다 이거야?"
나루미야의 울음소리가 크기를 더해갔다. 무시하면 반응이 올 때까지 쫒아다니며 괴롭힐 게 뻔하니 대충 상대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미유키는 늘 그게 어려웠다. 타인과의 거리를 어떻게 좁히고 넓혀야 하는 지 미유키는 전혀 몰랐다.
"나루미야."
"그래 나는 이제 중고라 이거지. 신품이 좋다 이거지! 나쁜 새끼."
"메이!"
"응. 카즈야."
여우 같은 새끼.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니 끝을 모르고 막나가는 말에 결국 이번에도 미유키가 졌다. 짜증을 한껏 담아 부르는 이름에 방긋 웃는 얼굴 뒤로 여우 꼬리가 하나, 둘, 셋, 넷. 대충 아홉개 정도 보인 것 같은데 착각은 아니겠지.
능력이 발휘 된 후유증으로 달고 사는 만성 두통은 언제나 미유키의 기분을 예민하고 날카롭게 만들어 주변에 사람 그림자도 얼씬 못하게 벽을 쳤다. 의도한건 아니었으나 사람과 엮이면 더 심해지는 두통에 자연스럽게 미유키 스스로도 벽을 쌓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잘해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를 노릇이다.
제 부름 한 번에 꽃처럼 웃으며 날아오는 자칭 연인을 다시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며 미유키가 사무실 한 쪽에 놓인 방문자 용 소파를 가리켰다. 끝나면 놀아줄 테니 얌전히 있으라는 신호에 이번에는 나루미야가 순순히 물러났다. 너무 꽉 조이면 터지는 법. 연인 사이에 가장 중요한 건 밀당이다, 밀당.
아무 사건도 없이 평화로운 오후 시간, 들리는 건 사각 거리는 만년필 소리 뿐이니 낮잠 자기 딱 좋은 조건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연인의 모습을 감상하던 나루미야의 눈꺼풀이 점점 느리게 움직이다 무거워졌고, 이내 감겼다
"ㅁ ㅣㅇ...ㅑ"
가볍게 톡톡 두드리는 느낌이 귀찮아 손을 휘저으며 몸을 틀었다. 현실과 꿈 중간쯤 위치한 정신은 계속 더 자길 원했으나 이내 강하게 내리치는 힘에 억지로 눈을 떠야했다.
"나루미야!"
"아, 씨- 뭐야."
혀 끝까지 차오른 욕을 집어 삼키며 쳐다보니 같은 팀 대원 중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앞에 서있다.
"뭐냐고."
꽃처럼 예쁘게 웃어주는 건 연인 한정 특별 서비스다.
"출동 명령 떨어졌다고. 빨리 일어나."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해가 떨어진 한밤 중이다. 언제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지. 평소 잠자리가 예민하고 귀가 밝은 나루미야였으나 누적 된 피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는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깊게 잠든 듯 했다.
"대장은?"
"다들 현장으로 바로 모이기로 했어. 나는 널 데리고 오라는 명령 때문에 돌아온 거고."
10명의 대원을 이끄는 대장이 연인인 건 여러모로 나루미야에게 슬픈 일이었다. 데이트 한 번 하기도 힘들었고, 손장난이라도 좀 해볼라 치면 10명의 대원들이 돌아가며 방해하기 일쑤였다. 아주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이 주어져 서류 작업만 끝나면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할 참이었는데 일 끝나자마자 튀었다 이거지.
눈에 훤히 보이는 미유키 행동에 나루미야가 매정한 연인에게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바닥에 뭔가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시선을 내려보니 아주 익숙한 옷이 보였다. 어깨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 자수. 그건 한 팀을 이끄는 대장만이 새길 수 있는 표식이다.
"대장님이 올 때 재킷도 챙겨오라셨어. 네가 전해드려."
그 말을 끝으로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텔레포트로 혼자 떠나버렸다. 대원들끼리는 물론이요, 대장과 대원들 사이가 끈끈한 다른 팀과 달리 미유키가 이끄는 팀은 철저하게 실력 위주였다. 물론 그 안에서도 친하게 지내는 대원들은 있었으나 적어도 미유키랑 나루미야는 그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사회 생활 하는 데 있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를 맺고, 다른 팀에 나름 친한 사람도 있는 나루미야와 달리 미유키는 정말 그 누구와도 친분을 쌓지 않았다.
최연소로 현장에 나가 최연소로 대장이 되어 팀을 맡았다. 미유키 카즈야를 수식하는 수만 가지 단어들 앞에는 반드시 최연소라는 단어가 셋트처럼 붙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반해 내 팀으로 들어오라고 스카웃 제의를 했지만, 단 칼에 거절 당하고 나루미야가 선택한 방법은 그의 팀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그 누구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 옆을 비집고 들어가 멋대로 눌러 앉아 저 좋을 데로 휘둘렀다. 그런 나루미야의 행동을 미유키는 전혀 거부하지 않았고, 받아주지도 않았다. 나루미야는 제 연인에게, 연인이라고 혼자 열심히 떠들고 다니는 사람에게 방치 된 상태로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벌써 10년 째 혼자만의 연애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만약 정말 싫었다면 날 죽였겠지. 미유키 카즈야는 그런 사람이니까.
"정말이지, 이러니 미워할 수 없다니까."
곁은 내주지도 않으면서 외롭거나 춥게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나루미야의 예민한 감각에도 걸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덮어줬을 재킷을 들어 얼굴을 파묵으니 미유키 냄새가 났다. 단단하고 강하면서도 쓸쓸한 겨울 바람 냄새를 맡으며 나루미야가 사무실 창을 전기로 날려버리며 창틀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나루미야가 창을 부수면 나루미야의 대장인 미유키가 잔소리를 듣겠지만, 귀여운 연인을 혼자 재운 벌이다. 미유키 재킷을 목에 감은 나루미야가 공기를 눌러 밟으며 튕기는 게 매력인 제 연인이 기다리고 있을 장소로 빠르게 뛰어갔다.
&
"야, 이 새끼야! 방어 벽 치라고!"
"터진다, 피해!!"
도착한 현장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하필이면 괴물들 중에서도 그 뒤처리가 가장 까다로운 용암을 내뿜는 괴물이었다. 아주 작은 한 마리가 쏟아내는 대 재앙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연약했고, 그만큼 난장판이었다.
여기저기 소리치는 사람들을 스쳐지나가며 나루미야는 제 연인을 찾았다. 꿀처럼 달콤하게 생겨놓고 가진 속성은 얼음이라니. 반전 매력에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악마 같은 연인이다. 미유키가 주로 사용하는 속성은 얼음으로 최저 온도는 현재 가진 기술로 측정 불가 판정을 받았다. 그 말인 즉 이런 용암 정도는 발가락만 까딱여도 충분히 얼리고도 남는 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나루미야가 맞이한 풍경은 펄펄 끓는 용암이 민가로 흘러들어가지 않게 고군 분투하는 대원들의 핏대 높인 목소리 뿐이다. 그렇다는 말은.
"미유키 카즈야 어딨어."
"윽- 뭐, 뭐야. 나루미야?"
"대장 어딨냐고."
미유키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다. 태어나길 일 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쉬는 날도 없이 제 몸과 영혼을 갈아가며 일하는 일 중독자가 현장을 이 따위로 방치하는 이유는 하나 뿐이다.
옆에서 별 도움도 안 되는 방어 벽을 치겠답시고 어설픈 손놀림을 하는 대원의 멱살을 잡아다 돌려 세우니 하라는 대답은 안 하고 너도 도우라는 헛소리만 짓고 있었다. 이 새끼는 필요없고. 원하는 답을 제대로 내뱉지 못하는 입 따위 가져서 뭐해.
"나루미야, 이 미친 새끼야!"
망설임 없이 전기로 한 놈 튀겨버린 나루미야가 서늘한 눈으로 다음 사냥감을 골랐다. 미유키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지만, 대원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얼굴에 싸우던 사람들이 뒤로 물러나며 괴물에게 쏟아붓던 욕을 나루미야에게로 돌렸다.
미유키도 없이 이따위 작업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 일에 미친 남자가 현장을 방치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 자리에 있는 대원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미유키를 구하러 가지 않았다.
"두 번 묻지 않아. 카즈야, 어딨어."
한 놈씩 튀기다 보면 누구 하나 아는 새끼가 나오겠지. 어차피 극도로 발달한 세포 조직 덕에 튀겨진 속도보다 더 빨리 재생 될 테니 튀겨버릴 놈들도 무한대다. 용암이고 괴물이고 뒤로 한 채 한꺼번에 달려드는 대원들을 바라보며 나루미야가 벌처럼 웃었다.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고."
&
현장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최연소로 현장에 나가 벌써 20년 가까이 이 더러운 꼴을 본 미유키조차도 조금 역한 기분이 들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용암을 내뿜는 괴물이 까다롭긴 했으나 미유키에게 전혀 문제될 건 없었다. 얼려버리면 그만이었고, 부서질 정도로 얼릴지 아니면 몇 만년은 녹지도 않을 만큼 얼릴지 고르기만 하면 됐다. 귀찮으니 전부 얼려버릴까 싶었으나 이 근처는 민간인들이 터를 잡은 곳이었고, 아주 가까운 곳에는 그들이 가꾸는 논과 밭이 있었다.
얼려버리는 것도 용암이 흐르게 놔두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선 방어벽을 치고 그 안에서 작업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움직였다. 아주 쉽고 간단한 일에 미유키는 문득 나루미야를 현장으로 괜히 불렀나 의문이 들었다. 천재라고 불리며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열린 미유키 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예민한 감각의 나루미야가 재킷을 덮어주는 것도 모르고 깊게 잠들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절대 지치지 않는 건 아니다. 오히려 뛰어난 만큼 여기저기 불려가 혹사 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누적된 피로는 어느 날 한꺼번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영원히 지치지 않을 것 같은 남자가 지쳐 잠든 모습을 떠올렸더니 아주 드물게 미유키 마음에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나루미야 메이는 여러모로 잘나고 대단한 남자였다. 충분히 자기 팀을 만들어도 되는 능력을 가졌으면서 고작 저같은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것만 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태어나길 이렇게 태어나 어딘가 고장난 미유키는 타인과 거리를 어떻게 조절해야 되는지 몰랐다. 멀어져야 하는지 가까워져야 하는지. 호의가 무엇이고 적의가 무엇인지 몰랐고, 매번 실패했고, 그러다 누군가 잃고 나서 멀어지는 쪽을 선택했다.
곁을 내주지만 않으면 전부 해결 될 문제였다. 다른 팀처럼 대원들과 사이가 가깝지 않아도 일 하는데 아무 불편함 없었고, 아파서 쉬는 날 어디서도 연락 오지 않아도 전혀 외롭지 않았다. 거리를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일의 능률적인 면에서는 훨씩 이득이었다.
"나루미야도 곧 도착할 겁니다."
심부름 보냈던 대원이 좌표를 잘못 찍었는지 용암 정중앙에 나타나 보고를 올렸다. 미유키는 타인과 늘 먼 거리를 유지하는 만큼 일 할 때도 주로 혼자 일하는 편이다. 대원들도 전투계보다는 방어계나 보조계 위주로 뽑은 것도 그 편이 혼자 움직이는 데 더 편했기 때문이다.
대원들이 방어벽을 펼치면 그 속에서 미유키 날 뛰는 식으로 일했더니 종종 대원들이 현장에서 긴장감을 놓치는 경우가 발생했다. 언제 어떤 상황이 와도 천재 미유키 카즈야가 해결한다는 인식이 깔려있는 탓이다. 물론 그게 딱히 틀린 소리는 아니었지만, 아주 드물게 틀린 소리가 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오늘이 그 틀린 소리가 되는 날 중 하나였다.
"대장!"
용암을 내뿜는 괴물이 까다로운 이유는 뜨거운 열과 모든 걸 녹여버리는 용암 탓도 있었으나 그보다는 용암 밑에 숨으면 찾기 어렵다는 점이 가장 컸다. 그래서 이런 경우에는 통째로 얼려서 부수거나 이공간으로 밀어넣는 식으로 해결하는 편이다.
미유키 팀의 대원들은 그 누구보다 미유키 능력을 가장 가까이에서 많이 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미유키가 얼마나 빨리 얼리고 부수는지 잘 아는 만큼 이번 임무가 아주 쉽다고 생각했다. 미유키랑 가장 상성이 좋은 괴물은 불 계열이었고, 이런 놈들은 수백 마리가 떼지어 와도 손가락만 까딱하면 쉽게 얼려버리는 사람이 미유키 카즈야다. 얼마나 빨리 끝내고 돌아가는 지는 미유키가 얼마나 빨리 손을 들었다 내려놓는지에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터졌다.
텔레포트 한 대원이 좌표를 잘못 찍은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실수였다. 하지만 굳이 보고를 용암 위에서 한 것은 하면 안 되는 실수였고, 하필 그 용암 밑에 괴물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공격한 것은 일어나선 안 되는 실수였다. 순식간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용암에 대원이 휘말린 순간 아주 가벼운 냉기만 남기고 미유키도 사라졌다.
방어계와 보조계가 대부분인 대원들은 큰 패닉에 빠졌고 차마 두 사람을 구하러 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러다 다 죽는 건 아닐까 자꾸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을 털어내야만 했다. 미유키를 제외하면 유일한 전투계인 나루미야가 도착할 때까지만 버티면 어떻게든 해결 될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대원들은 나루미야 손에 한 명씩 튀겨지고 있었다.
괴물에게 잡아먹히는 게 더 빠를까, 미친 동료에게 튀겨지는 게 더 빠를까.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나루미야에게 목이 잡힌 대원이 거품을 물며 발버둥치다 축 늘어졌다.
"마지막 놈이었는데."
형체도 알 수 없을만큼 새까맣게 그을린 숯덩이들이 여기저기 쓰레기처럼 떨어져 있었다. 보기에는 조금 흉해도 이 중에서 목숨을 잃은 대원은 없었다. 안전한 곳으로만 옮겨주면 하루 또는 이틀 후면 죽었던 세포들이 재생 돼 다시 살아날 거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만 준다면.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것처럼 손을 털어낸 나루미야가 끔찍할 정도로 끓는 용암을 가늘어진 눈으로 노려봤다. 전기 속성인 나루미야는 불 계열과 상성이 좋질 않았다. 하지만 알게 뭐람. 토끼 같은 연인이 오매불망 울면서 내가 구해주기만 기다리는데 구해줘야지.
가볍게 목을 풀고 손목을 털며 전기를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전기도 결국엔 불이다. 용암과 전기 중 더 오래 더 뜨겁게 타오르는 건 어느 쪽일지 해보지 않고선 모를 일이다. 손 끝이 금빛을 물들고 동공이 가늘어진 나루미야가 힘을 아낌 없이 개방하려는 순간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카즈야?"
겨울의 돌풍을 닮은 서늘한 기운에 가늘어졌던 나루미야의 동공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틀림없이 미유키였다. 이런 뜨거움 속에서도 서늘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미유키가 유일했다.
"메이?"
질릴 정도로 끓던 용암이 얼어붙으며 길을 텄다. 그 속에서 미유키가 기절한 대원 하나를 끌고 나타났고, 그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짐작한 나루미야가 사납게 웃어보였다. 저딴 걸 지키겠다고 위험을 무릅쓰다니. 매정한 제 연인은 눈물날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메이. 대원들한테 능력을 쓰면 안 돼."
한 번 훑어 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한 건 미유키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여유만만 미소를 잃지 않는 나루미야였으나 아주 가끔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날을 세웠다. 미유키가 타인과의 관계에 방향을 잃고 헤매다 전부 포기한 경우라면 나루미야는 곁을 내주는 척 친근하게 굴다 다가오면 배척했다.
단단히 속이 꼬인 분위기지만, 웃는 얼굴만큼은 꽃처럼 화사해 미유키는 머리가 아팠다. 뭔가 기분 나쁜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 방법이 없었다. 기분 나쁜 나루미야를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달래주는 게 맞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태에서 미유키가 선택한 것은 가장 쉬운 회피였고, 기절한 대원을 안전한 쪽에 눕혀 놓고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나루미야는 제 발치에 놓인 대원을 한 번, 용암을 얼리느라 바쁜 미유키를 한 번 돌아가며 쳐다봤다. 지금 여기저기 널브러진 숯덩이들은 나루미야가 튀겨버린 대원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제 곁에 기절한 대원을 눕혀놓는 의도를 모르겠다.
어차피 나루미야는 미유키를 이해 못했다. 이해 받은 적도 없고, 이해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멋대로 휘두르고 싶었고, 휘둘려만 준다면 만족이었다. 용암은 순조롭게 얼어붙고 있는데 나루미야 속은 점점 더 끓고 있었다. 현장에 나간 대원들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전부 대장 책임이었다.
'알게 뭐야.'
어차피 무책임한 연인이다. 나즈막히 욕을 뱉은 나루미야가 끓는 속을 외면하지 않고 하고 싶은 데로 움직였다. 조금 전부터 발치에서 거슬리던 대원을 남기지 않고 튀겨 버린 것과 동시에 미유키가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메이. 그러면 안 된다니까."
"알게 뭐야."
꼬인 속을 그대로 내뱉으니 말투가 이리 저리로 튄다. 그래도 여전히 덤덤하기만 한 미유키 얼굴에 나루미야는 진정되지 않는 짜증으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저를 동료로 생각하지도 않고 아껴주지도 않는 대원을 지키겠다고 위험을 무릅 쓴 미유키한테 화가 났다. 이렇게 구해줘봤자 고맙다는 소리 하나 못 들으면서.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미련한 것도 천재적이었다.
"어디 다쳤어?"
그런 제 속은 하나도 모르는 얼굴로 태연하게 다가온 미유키가 나루미야 볼을 문질렀다. 여기저기 전부 숯덩이로 만들면서 생긴 재가 제 볼에도 튀었는 볼을 문지른 미유키 손에 검뎅이 묻은 게 보였다. 왜 화났는지 관심도 없고 이유도 모르면서 다정하게 달랜다.
"어. 다쳤어. 완전. 많이."
눈 감고 봐도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 다쳐서 아프다고 떼쓰기 시작한 나루미야를 물끄러미 보던 미유키가 아주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알았어. 돌아가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으면서도 그 속내가 빤히 들여다 보이니 여러모로 미유키에게 나루미야는 연구 대상이었다. 아프다는 나루미야 말이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혹시나 진짜 다쳤을까 싶어 빠르게 훑으며 미유키가 먼저 자리를 떴다.
숯덩이가 된 대원들은 본부에 알려 수거해야 될 것 같았다. 어차피 괴물도 퇴치했겠다, 조금 추운 것만 빼면 안전한 곳이니까. 성큼성큼 앞서 걷던 미유키가 뒤에서 느껴지지 않는 인기척에 멈춘 후 돌아보았다. 시력이 나쁜 미유키 눈에도 멀리 떨어진 얼굴에 심통이 덕지덕지 붙은 게 잘 보였다. 여기서 달래주지 않으면 역시 피곤하겠지? 남을 달래본 적은 없었지만, 나루미야를 달래는 거라면 아주 쉬웠다.
"메이. 밥 먹을까?"
"뭐야, 그런 걸로 넘어갈 생각하지 마."
"데이트야. 어때?"
연인이라고 우기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더니 세뇌라도 됐는지 낯간지러운 표현이 잘도 흘러나왔다. 저 까다로운 나루미야 메이를 달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데이트라는 말을 하기가 무섭게 뛰어온 나루미야가 미유키 품에 덥썩 안기며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자꾸 이런식으로 연인을 방치하는 건 나빠."
"그래, 그래."
이런 단순한 말로 기분 풀린 나루미야 머리를 작게 토닥이며 미유키가 걸음을 옮겼다.
"예뻐서 봐주는 줄 알아."
"네. 감사합니다."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신나는 음성으로 바꼈고,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 차가운 바람이 잠시 머물다 흩어졌다.
능력자물 처돌이가 이번에는 초능력자물을 들고 왔다네요. 이게 뭐라고 만자나 썼는지 의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서툰 미유키랑 그런 미유키를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메이가 보고싶었는데 탄생한건 무언가의 번데기....그냥 보고 싶은거 생각 나는데로 쓴 거라서 어딘가 어색할 거에요. 아마 처음부터 끝까지? 근데 다시 확인할 기력은 없으니 넘어가주세요 헤헷
메이가 연인이라고 하면 연인인 겁니다. 미유키 카즈야 반박은 메뮤 연성으로 받겠다!! 억울하면 메뮤 연성으로 항의해보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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