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나타 쇼요
어느 날 히나타가 사라졌다
w. 달향기
어느 날 히나타가 사라졌다. 누구 아이인지 모르는 애를 임신한 채로. 그런 상황에서 애인 뫄뫄의 반응은?
"임신입니다."
누구보다 간절하게 바랐던 그 말이 이렇게 끔찍하게 들릴 거라고 과거의 나는 상상이나 해봤을까. 거짓말이죠, 선생님. 다시 검사해주세요. 꽉 잠겨 파르르 떨리는 내 말에 안 좋은 기운을 느꼈는지 의사의 얼굴에 난감한 표정이 떠올랐다. 임신 3개월입니다. 다시 한번 떨어지는 말에 목이 잘린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질 않고 말이 나오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제대로 목이 붙어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체력도 많이 떨어지셨고, 좀 더 세심하게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주의사항을 읊어주는 말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한 사람뿐. 어쩌지. 어떻게 해야 해. 나 이제 당신 곁에 있을 수가 없어. 참담한 마음에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이대로 그냥 영원히 잠들어 버리면 곁에 있을 수 있을까.
보고 싶어.
며칠째 히나타랑 연락이 되질 않았다. 아주 가끔 일이 너무 바쁘면 집에 도착해 쓰러져 자기 바빠 연락이 안 되는 때도 있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잘못이었을까. 정적을 깨고 울리는 벨 소리에 핸드폰을 들어보니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찍혀있다.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지 않는 편이지만, 그 날따라 묘한 기운에 홀린 듯이 전화를 받았고 수화기 너머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반가워할 틈도 없이 상하고 갈라진 목소리에 절로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또 무리해서 일하고 있었나 보네. 일하는 사람의 건강은 전혀 생각도 안 해주는 그 망할 놈의 회사 그만두라고 말해도 일이 좋다며 웃는 얼굴에 결국 속상한 건 츠키시마 몫이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바빴어? 밥은. 목소리가 왜 이렇게 안 좋아. 잠을 자긴 한 거야?"
어깨로 핸드폰을 고정한 채 빠르게 주변을 정리했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어 이대로 퇴근해도 괜찮았다. 분명히 무리하느라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을 게 뻔하다. 속이 많이 상했을 테니 가벼운 죽이라도 먹이고 한숨 재워야겠다. 서둘러 나갈 준비 하던 츠키시마는 수화기 너머로 흐릿하게 들리는 울음소리에 핸드폰을 다시 고쳐 쥐었다.
"무슨 일이야."
-흐흡
히나타는 언제나 자기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다. 즐거우면 웃었고 슬프면 우는 단순하면서도 솔직한 사람. 이렇게 울음소리를 죽여가며 우는 사람이 아니었고, 츠키시마는 바로 비서를 호출했다.
"히나타. 자기야. 지금 어디야."
-흐흑 츠, 츳키
차갑게 굳은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다정하게 흘러나왔다. 처음 보는 전화번호,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울고만 있는 히나타. 무슨 일이 벌어진 게 분명했다. 메모지에 빠르게 전화번호를 적으며 당장 위치를 알아오라고 비서에게 전달하고 츠키시마는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일단은 히나타 집부터 가봐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나, 나 찾지 마.
"무슨 일이냐고."
-그냥 찾지 마. 찾지도 말고, 다른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아.
속도를 높이던 차를 길가에 급하게 세웠다. 사고 나지 않게 운전할 자신이 없어 끼익-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차를 세운 츠키시마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다그치지 말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히나타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일단 얼굴부터 봐야 했다.
"쇼요. 어디야."
츠키시마가 애타는 목소리로 달래자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짐작 가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초조하게 히나타 이름을 부르며 어르고 달래던 츠키시마는 다른 핸드폰을 들어 비서에게 연락을 넣었다.
-나 임신했어.
어디까지 알아봤냐고 빠르게 문자 보내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아이는 츠키시마랑 히나타 간절히 바라던 거였다. 임신이라면 누구보다 기뻐하며 연락했을 텐데 막상 애가 생기니 무서워진 걸까. 설마 나 몰래 애를 지우고 도망친 걸까. 히나타가 도망칠 법한 이유를 이것저것 떠올리던 츠키시마가 다시 빠르게 비서에게 문자를 보냈다.
[히나타가 방문한 산부인과가 어딘지 알아와]
"임신했으면 내 옆에 있어야지, 지금 어디야."
변함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히나타를 달래던 츠키시마는 갑자기 터져 나오는 울음에 초조하게 입술만 물어뜯었다. 그냥 지금 당장 히나타 얼굴을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히나타. 자기야. 쇼요. 왜 그러냐고 울지 말라는 목소리에 숨기지 못한 초조함이 배어들었다.
-미안해. 흐윽.
"괜찮아. 괜찮으니까 얼굴 보고 얘기해. 데리러 갈게."
-네 애 아니야. 네 애가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울음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고 츠키시마는 잠시 숨을 멈춰야 했다. 지금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히나타가 내뱉은 말을 하나하나 곱씹는 동안 다른 핸드폰이 울렸고, 히나타 위치를 알아냈다는 비서의 말이 들렸다.
"위치 문자로 찍어서 보내고 지난 반년간 히나타 행적 샅샅이 뒤져서 만났던 사람 리스트 뽑아 놔."
전송된 주소를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차를 출발했다. 얼굴 먼저 보는 게 우선이다.
그 뒤에는.
얼굴을 보고 난 후에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츠키시마는 묵묵히 속도만 높였다.
며칠째 히나타랑 연락이 되질 않았다. 계속 쳐다보고 있어도 까맣게 변한 화면에 불이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만 바라보며 탁- 탁- 탁- 일정한 속도로 탁자를 두드리던 켄마가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우편물을 집어 들었다.
직접 배달한 건지 발신인도 소인도 찍히지 않은 우편물을 뜯으니 사진 몇 장과 진단서가 들어있었다. 임신 3개월. 지난 반년간 외국을 돌며 스케줄을 끝마치고 켄마가 돌아온 날짜는 이제 겨우 일주일이다. 제 아이가 아니니 도망을 친 거겠지.
"바보 같은 쇼요."
아이 따위에 겁먹고 도망친 히나타의 멍청함이 귀여웠다. 히나타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아이를 가진 것보다 반년 만에 돌아왔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점이 더 화가 났다. 집에 돌아오면 당장 품에 안고 질릴 때까지 살 내음을 맡겠다고 세웠던 계획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어딜까. 어디에 있을까. 짐작 가는 곳은 세 군데. 사람을 풀었으니 이제 곧 연락이 오겠지. 지난 일주일간 잠도 식사도 엉망이었다. 히나타가 고팠고 히나타가 급했다. 집안 곳곳에 히나타 냄새가 가득했고 켄마는 버틸 틈도 없이 너무나 쉽게 흥분했다. 아플 정도로 빳빳하게 일어선 곳은 도통 가라앉질 않았고 결국 청바지를 벗고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쇼요."
이름만 불러도 아찔했다. 쇼요 빨리 돌아와야 할 거야. 이성이 점점 흐려졌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지금 돌아오면 다정히 안아줄 수 있을 텐데. 가만히 눈을 감고 호흡으로 히나타를 느끼는 켄마의 정적을 깨고 전화가 울렸다. 화면에는 처음 보는 번호가 찍혔지만, 히나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핸드폰 번호를 아는 건 히나타밖에 없으니까.
"여보세요."
히나타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전화를 받으니 반대쪽에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어. 케, 켄마.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 아- 지금 당장 내 이름을 부르는 목덜미에 이를 박고 싶어. 아찔하게 치고 올라오는 흥분에 켄마가 느리게 숨을 뱉었다. 아직은 아니야. 켄마가 대답이 없자 당황한 히나타가 우물쭈물 누군가에게 전화를 안 받는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쇼요."
-켄마야?
"응. 나야."
변함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안심했는지 대답하는 히나타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자- 이제 어떻게 말을 꺼내볼까. 탁자에 어지럽게 던져진 사진을 하나하나 쳐다보며 켄마가 생각을 정리했다. 처음 보는 남자와 같이 호텔로 들어가는 히나타 사진이 한 장, 두 장, 세 장. 전부 다른 날 찍힌 사진이었다.
-켄마, 나.
"쇼요. 돌아와."
하지만 그게 뭐. 히나타가 다른 남자랑 잔 것도 그 남자의 애를 가진 것도 켄마한테 있어서는 하나도 중요치 않았다. 켄마가 있는 공간에 히나타가 없는 것. 중요한 것 그것뿐. 반년을 참았다. 인내심은 한계까지 가늘어져 있었고 언제 끊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돌아와, 쇼요. 아직 내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며칠째 히나타랑 연락이 되질 않았다. [잠시 여행 좀 다녀올게요] 달랑 문자 하나만 남겨놓고 사라진 히나타를 계속 기다려야 할지, 찾아야 할지 아카아시는 고민에 휩싸였다. 연결되지 않는다는 멘트가 나올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전화를 걸었고, 끊기지 않고 계속 울리는 신호음에 반쯤 의자에 기댔던 몸이 튕기듯이 일어났다.
여보세요. 간절히 듣고 싶었던 목소리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점 차분해졌다. 어딘가요. 여행은 즐거운가요. 묻고 싶은 말은 많은데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입만 벌리고 다물기를 수차례. 케이지-하고 불리는 이름에 겨우 입이 떨어져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말할 수 있었다.
"쇼요. 몸은 괜찮아요?"
궁금한 건 많았지만, 그래도 가장 궁금한 건 역시 이거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녀온다 했던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카아시가 하는 일은 평소에는 죽기 직전까지 바쁘고 말일이 되면 죽을 만큼 바빴다. 히나타가 병원 가던 날은 하필이면 죽을 만큼 바쁜 날 중에서도 최악으로 바쁜 날이었고, 아픈 애인을 혼자 병원에 보냈다는 미안함은 가시처럼 목에 걸려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네. 괜찮아요. 케이지는 잘 지내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다행히 히나타 목소리는 밝아 보였고, 그 목소리에 안도하는 순간 간절한 바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미처 숨길 새도 없이 튀어나간 진심에 아카아시는 잠시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차분히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너무 간절하게 히나타가 보고 싶은 건 사실이니까. 그 말에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아카아시는 저도 모르게 투정 부리듯이 진심을 툭툭 던졌다. 밥은 먹었어요? 보고 싶어요. 언제 와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아주 드물게 보여주는 아이 같은 모습에 히나타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도 여행 중이에요?"
-네. 좀 더 있다가 갈 것 같아요.
히나타 웃음소리를 배경음 삼아 퇴근 준비를 하던 아카아시가 달력을 확인했다. 죽을 만큼 바쁜 시기는 지났고, 스케줄을 조금만 더 빠듯하게 조이면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시간 계산을 하던 아카아시가 히나타한테 지금 어디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내가 보러 갈게요."
-바쁘잖아요.
"내가 보고 싶어서 안 되겠어. 지금 당장 못 보면 매일 밤 울다 지쳐 잠들지도 몰라요."
애정 섞인 투정에 결국 히나타도 포기했는지 순순히 있는 곳을 알려줬다. 지금 출발하면 9시 전에는 도착하겠네. 차에 시동을 걸고 급히 출발하며 히나타를 만나면 가장 먼저 뭐부터 할지 순서를 정했다. 일단 꼭 껴안고 맛있는 밥도 먹고, 밤새 얘기도 하고. 생각만 해도 설레는 기분이 드는 게 마치 처음 데이트하러 나가던 순간 같았다.
분명히 데이트하는 기분으로 만나러 온 거였는데 말이다. 지금 아카아시는 마음이 바닥에 떨어져 잘근잘근 짓밟힌 기분이었다.
"쇼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다른 사람 아이를 가졌어요. 그래서 더는 케이지를 만날 수가 없어요."
비명이 터질 것 같아 입술을 질끈 깨물어야 했다. 문이 열리고 히나타를 보자마자 그동안 그리웠던 만큼 꽉 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이었지만 아카아시는 그 작은 몸에서 안정을 느꼈다. 그동안 못 봤던 만큼 충전하느라 바빠 한참을 현관에서 움직이지도 못했다. 겨우 품 안의 몸을 놓아주고 자리에 앉아 산더미처럼 쌓인 질문을 던지려던 아카아시는 기다렸다는 듯이 히나타가 던진 폭탄에 한순간 넋이 나갔다.
아파서 갔다던 병원은 산부인과였고, 거기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는 얘기부터 그 아이가 아카아시 아이가 아니라는 얘기까지. 뭐하나 제정신으로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없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몸을 끌어안고 맛있는 걸 먹으며 못다 한 얘기를 하겠다는 계획은 산산이 부서졌다. 산소가 부족했다. 분명히 숨을 쉬는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산소가 부족해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고, 아카아시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 사람이랑 결혼해요?"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원망 섞인 말이 튀어 나갔다. 날 버리고 그 사람을 만날 건가요? 소리치지 않고 울지 않는 게 아카아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헤어지겠다는 말보다 다른 사람을 만날 거라는 말이 더 무서웠다. 헤어지는 건 한 번의 기회가 더 있지만,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그 기회마저 없다는 말이니까. 덤덤하게 말하던 히나타 표정이 아카아시의 질문에 와르르 무너졌다.
"그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얼굴에 지푸라기만큼 희망을 발견한 아카아시가 무릎 꿇고 간절히 애원했다. 버리지 마요. 나한테 그러지 마요. 앉아있는 히나타 앞에 다가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애원하고 조르고 떼썼다.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면 나를 떠나지 말아요.
"쇼요 아이잖아요. 그거면 돼. 나는 그거 하나면 돼요."
나만 떠나지 않는다면.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아카아시는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빌고 또 빌었다.
며칠째 히나타랑 연락이 되질 않았다. 히나타를 몰아세우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지만, 우시지마는 이제 더는 무리라는 걸 깨달았다. 만나고 나서도 여전히 저를 어려워하는 히나타를 배려해 다정하고 부드러운 연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사실 우시지마는 좀 더 히나타를 옥죄고 싶었고 옆에 묶어두고 싶었다. 이런 집착과 소유욕이 답답해 도망쳤을지도 모른다. 그걸 잘 알고 있어 히나타에게 연락이 오기만 기다렸고, 일주일이면 우시지마도 많이 참았다고 생각한다.
"히나타 쇼요."
초인종을 누르고 그 잠깐을 못 기다려 문을 부술 기세로 두드렸다. 제 딴에는 힘을 조절한 거였지만, 타고난 힘이 강해 한 번 두드릴 때마다 문이 흔들렸다. 집에 없는 건가. 되돌아갈지 좀 더 기다릴지 고민하는 사이 도어락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히나타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보면 그동안 연락이 닿지 않은 불만이 튀어나가는 건 아닐까, 그걸로 히나타가 겁먹는 건 아닐까 고민하던 게 무색해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벌컥 문을 연 우시지마는 강한 힘에 넘어질 뻔한 히나타를 붙잡고 꼼꼼히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원래도 작고 마른 몸은 제대로 먹은 것도 없는지 살이 빠져 뼈밖에 느껴지지 않았고, 그마저도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지."
차라리 잘 먹고 잘 쉬어 살이 올랐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텐데. 이리저리 잡아끄는 손길에 힘없이 흔들리는 몸에 우시지마는 터질 것 같은 화를 꾹꾹 내리눌렀다. 조금만 힘을 주면 진짜로 뼈가 부러질 것 같아 최대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히나타를 데리고 들어온 우시지마는 소파가 아닌 침대에 히나타를 앉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에 지금 바로 얘기하는 것보다는 히나타를 조금이라도 재워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다."
"정말 괜찮아요."
눕히려는 손길을 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난 히나타가 부엌에 들어가 물을 꺼냈다. 반이나 비워진 물병도 버거울 만큼 체력이 떨어진 건지 덜덜 떨리는 손에 우시지마가 물병을 뺏어 들고 대신 물을 따랐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피곤한 얼굴이면서 히나타는 쉴 마음이 없어 보였다. 부엌을 나와 거실로 걸어가는 히나타 뒤를 졸졸 쫓아가며 우시지마는 말 꺼낼 타이밍을 노렸고, 소파에 앉는 걸 본 후에야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오늘은 그냥 가면 안 될까요."
"그럴 수는 없다."
"제발요."
피곤하고 지친 몸은 그 잠깐의 움직임에도 힘들었는지 말하는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평소라면 우시지마도 물러났겠지만, 이 정도로 망가진 히나타 모습은 처음이라 물러설 수가 없었다. 혹시 어디 몸이 아픈 건 아닐까. 집에 무슨 일이 있었나. 묻고 싶은 질문은 산더미였고 우시지마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단호한 표정의 우시지마를 쳐다본 히나타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무릎을 세워 그 속에 얼굴을 묻었다. 그건 히나타가 힘들고 지칠 때 하는 자세였고, 우시지마는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 나쁜 소름에 인상을 찌푸렸다. 묘하게 불길한 이 느낌은 대체 뭐지. 우시지마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히나타 쪽에서 먼저 말이 터져 나왔다.
"임신했어요."
터져 나왔다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폭탄처럼 던져진 말에 한 방 맞은 우시지마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시지마는 저와 히나타의 아이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히나타를 옆에 묶어둘 수 있다면 그게 뭐가 됐든 간절히 원했고, 아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히나타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만약 우시지마의 아이까지 갖게 된다면 히나타가 그를 벗어날 방법은 영영 없어지는 거니까. 그런 속내를 우시지마는 잘 알고 있었고, 아직 다정한 연인의 껍데기를 벗어던질 시기가 아니었기에 우시지마는 히나타가 원하는 데로 해주었다.
그래서 저런 꼴이었군.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 결국엔 우시지마 옆에 묶이게 되었으니 히나타가 단단히 속이 상한 게 분명했다. 달래줘야 할지 아니면 솔직하게 좋아해야 할지 망설이는 우시지마 속내를 읽은 히나타가 얼굴을 구겼다.
"좋아하지 말아요. 당신 아이 아니니까."
예고도 없이 두 번째 폭탄이 떨어졌다. 히나타가 아이를 가졌으면 그건 우시지마 아이여야 했다. 아니 우시지마 아이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아이라니. 제법 재밌는 소리도 하는군. 차게 비웃은 우시지마가 무슨 소리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다른 사람 아이를 가졌다고요.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히나타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 무슨 말을 해도 꿈적하지 않는 우시지마 모습에 열 오른 히나타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거친 숨소리에 우시지마가 히나타를 진정시킬 요량으로 손을 뻗었지만 아플 만큼 강하게 내쳐지기만 했다. 거부당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손을 뻗고 또 뻗고. 결국, 먼저 지친 건 히나타였다.
천천히 부드럽게 달래는 손길에 히나타도 진정 됐는지 조금 전보다 숨소리가 차분해졌다. 열이 올라 붉게 상기됐지만, 한층 차분해진 얼굴에 우시지마가 말을 이었다.
"배 속에 있는 건 내 아이다."
"다른 사람 아이예요."
"내 아이다."
허리를 숙여 어깨를 붙잡은 우시지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 히나타도 단호하게 정정했지만, 우시지마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의미 없는 공방이 오갔고 히나타는 이제야 우시지마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저 남자는 히나타가 낳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우려는 거다. 그렇게라도 히나타를 제 옆에 꽁꽁 묶어둘 생각인 거다.
"그 아이는 내 아이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히나타는 숨이 막힘과 동시에 마음 한편으로 안도하는 저를 발견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겉으로는 벗어나고 싶어 했으면서 사실은 이렇게 저를 붙잡아 주길 원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진짜 추접스럽다. 속으로 강하게 저를 비웃으며 히나타는 반복되는 우시지마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낳은 아이는 내 아이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그 말에 우시지마는 다정한 미소를 띠었고, 히나타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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